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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Jun 28. 2019

여자는 축구하면 안 돼?

할아버지: 우리 손녀 아직도 축구하러 다녀?
손녀: 응 축구 엄청 재미있어.  
할아버지: 어~ 이제 그만해라.
손녀: 왜?
할아버지: 여자가 뭘 그런 걸 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손녀: 난 축구 재미있는데...
할아버지: 여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이쯤에서 아이가 상처 받을까 싶어 개입하려는 찰나)
손녀: 할아버지, 그럼 여자는 뭐 해야 해?
할아버지: 으응???
손녀: 여자는 뭘 하면 되냐니까?
할아버지: 그게.... 음...
손녀: 여자는 뭘 하면 돼?
할아버지: 어.. 그건 나중에 만나서 상의하자. 이만 끊자 우리 손녀.


지난해 우리 딸이 할아버지와 통화하는 중에 있었던 대화이다. 올해 열한 살인 우리 아이는 일주일 중에 목요일을 제일 좋아한다. 학교를 마치고 축구를 하러 가기 때문이다.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의 이름을 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축구 클럽에서 두 시간 동안 축구를 한다. 같은 학교 친구들끼리 그룹이 나누어져 있어서 아이가 더 좋아하는 것도 같다. 우리 아이가 있는 그룹에는 여자아이가 두 명뿐이다. 때로는 과격한 남자아이들한테 치이기도 할 텐데도 축구를 하고 온 목요일 저녁에는 아이의 기분이 늘 좋다. 목요일이면 아예 축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갈 정도이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직접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경기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프로 축구 등은 물론이고 월드컵도 잘 보지 않는다. 축구뿐 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구기종목에 관심이 없다. 올림픽 경기도 김연아 같은 유명한 선수가 나오는 경우에나 겨우 챙겨보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스포츠를 보거나 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물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농구나 축구를 하는 시늉을 내기는 했지만, 잘하지도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축구나 야구 등의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남자가 어떻게 스포츠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심지어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나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무용담인 사람들의 눈에는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것과 남자다운 것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남자다움"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남자들은 다 자동차를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차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나에게 차라는 존재는 사람과 짐을 멀리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안전하게 잘 굴러만 다니면 된다. 반짝반짝 빛이 날 필요도 없고 최첨단 전자기기로 무장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니 차를 때마다 바꾸지도 않는다. 한 번 사면 폐차할 때까지 탄다.


아이가 훨씬 어렸을 적, 그러니까 서너 살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빠는 무슨 색이 좋아?"
"아빠? 아빠는 핑크색이 좋아"
"아~ 그래? 나는 노란색~"

그때부터 아이는 아빠가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빠한테 그림 선물을 하거나 무언가 만들어 줄 때는 항상 세심하게 분홍색을 섞어서 예쁘게 만들어 준다. 한 번은 엄마와 둘이서 이어폰 등을 넣는 파우치를 사러 갔었는데, 아빠는 핑크색을 좋아한다며 딸기 우유색 파우치를 사 가지고 온 적도 있다.


사실 내가 분홍색을 정말로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색을 특별히 좋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무슨 색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남자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여자가 분홍색을 싫어할 수도 있고 파란색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핑크가 좋아졌다.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남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고 파란색을 좋아하고 차를 좋아하는 걸까? 반대로 여자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꿉놀이를 좋아하고 분홍색 옷만 입으며 인형놀이를 즐기는 걸까? 물론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택의 제한으로 인해 특정 색과 행동에 더 익숙해지고, 주위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어른들이 무심히 던지는 "무슨 여자애가 남자애처럼 노냐?", "남자애가 뭐 이렇게 소심해?", "여자가 이런 걸 해?", "남자가 왜 분홍색을 좋아해?" 따위의 말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분홍색이든 파란색이든 노란색이든 아이한테 어울리는 옷을 입히면 그만이다. 아이에게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색상을 접하게 해서 고정관념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자는 다소곳하고 얌전해야 하며 남자는 씩씩하고 활기가 넘쳐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도 축구를 좋아할 수 있고 남자도 자동차에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여자니까, 남자니까, 이런 말을 무의식 중에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양성평등 사회로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기존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른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주 전, 아이는 축구를 그만두었다. 같이 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축구클럽에서 더 이상 그 반을 운영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축구에서 농구로 갈아타는 것이 요즈음의 유행인 듯하다. 마지막 축구를 하고 온 날, 아이는 유니폼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축구가 정말 재미있었고 그 클럽에서 축구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하면서 한동안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아내한테 전해 듣는 내내 아이의 우는 모습이 떠 올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가 볼까 한다.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지만 아이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Cover photo by Fauzan Saar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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