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집ㆍ창신방앗간ㆍ수원성갈비ㆍ나주홍어ㆍ대영통닭
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동대문 밖 첫 동네다. 낙산 동쪽 기슭부터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형성된 창신동은 조선 초부터 있었던 한성부 행정구역인 인창방과 숭신방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됐다.
창신동은 17세기 무렵 빈번했던 자연재해와 흉년이 겹치면서 몰락한 지방 농민, 일제 강점기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유입, 한국전쟁 전후 도시 빈민들의 토막집 등의 역사적 배경으로 창신동은 서울서 가장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인 동시에 난개발 지역이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시장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창신동 역시 동네 어귀부터 좁은 골목을 따라 길게 형성된 창신골목시장이 있다. 1969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노점이 모여들기 시작해 만들어진 시장이다. 시장의 구불구불한 길은 과거 물길이다. 시냇물이 흐르던 자리가 복개로 땅이 되면서 자연스레 물건을 사고파는 점포들이 들어선 것이다.
창신동을 관통하는 창신골목시장 주변부는 1920~3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 ‘조선의 디벨로퍼’로 불리는 정세권은 일제 강점기 부동산 개발업자로 북촌과 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서 큰 필지를 쪼개 도시형 한옥을 지었다. 늘어나는 인구 대책으로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 한옥을 공급해 주택난을 해소했다.
2000년 이후 봉제산업이 침체를 맞으면서 변화를 꾀하던 창신동은 인접한 숭인동과 함께 2007년 4월 뉴타운 지구로 지정됐지만 2013년 주민들 요청으로 해제되는 곡절을 겪었다. 2014년에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선도지역 공모를 거쳐 서울에서 1호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지역재생기업 조성, 지역 연합 커뮤니티인 창신마을넷 등 소기의 성과를 냈지만 도시재생사업의 어려움을 재확인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가운데 최근 창신초등학교 뒤쪽으로 개발소식이 있고 창신골목시장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특히 시장의 변화는 지역 문화관광 사업과 자연스레 연계되기 때문에 활성화는 곧 지역 경제를 이끄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잠재적 가치는 누가 어떻게 그것을 끄집어내느냐에 달렸다.
얼마 전 지인을 통해 창신동 토박이면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남용섭 플떡랜드 대표를 만났다. 창신동에서만 50년 이상 살았고 조부 때부터 3대가 동네를 지키고 있다. 남 대표의 본업은 굿즈를 만들어 파는 일이다. 특이한 것은 ‘단 1개’도 만들어준다는 영업 방침이다.
그런 그가 창신집(창신.zip)이란 요리주점을 몇 해 전 시장 한가운데 열었다. 그는 창신집 창업 이유를 단순히 음식과 주류를 판매하는 요리주점이 아니라 창신동이라는 지역을 지키고 되살리기 위한 작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남 대표는 “창신동은 한때 창신초등학교 학생이 1만 명을 넘길 정도로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활기찬 지역이었으나 최근에는 주민들이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지역을 지탱하던 작은 봉제공장들도 산업 쇠퇴로 하나둘 사라지게 됐다”며 “창신동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지역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창신집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창신집은 창신동을 찾아와 동네의 매력을 느끼고 더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창신동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자 외지인들이 이곳을 알게 되는 지역 문화 공간”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그의 목표는 적중했다. 창신집은 시장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이 됐고 시장 상인들과 협업을 통해 동반성장하는 공유모델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창신집은 단순한 요리주점 이상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맞은편 ‘창신방앗간’, 인근의 공유공간인 ‘공유창신’과 ‘공유독도’ 등 모두 남 대표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창신골목시장 일대 공간들이다.
창신동은 필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공간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역사인문공동체 문화지평에서 여러 번 역사문화탐방을 진행했다. 오래된 성저십리 마을이라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흥인지문, 문구골목(한옥지역), 창신시장, 이음피움봉제역사관, 창신동절개지, 창신소통공작소, 회오리마당, 김광석 거주지, 안양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등을 코스로 잡아 돌아봤다.
지난 17일에는 문화지평에서 주관하는 인문강연회 ‘문지인문아카데미’를 ‘공유창신’에서 진행했다. 강연자로는 한국일보 교열팀장으로 있으면서 최근 ‘어른을 위한 말 지식’이란 우리말 바르게 쓰기 지침서를 펴낸 노경아 작가가 나섰다. 노 작가는 한국일보를 비롯해 신문사에서 29년 간 교열전문기자를 하고 있는 우리말 제련사다.
강연에서는 어려웠던 우리말을 재미있는 어원과 생생한 사례를 들어 설명해 이해를 돕고 고운 우리말을 만나는 기쁨도 함께했다. 늘 쓰는 말 중에 헷갈리는 단어 구분, 잘못 쓰는 한자어 예, 사이시옷과 띄어쓰기에 대한 정보까지 쿨팁을 제공해 막연하고 모호했던 우리말 지식을 종합적으로 선사했다.
이뿐 아니라 창신골목시장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맛집도 제법 있어서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가성비 좋은 수입 갈비 전문점 ‘수원성갈비’, 묵은지와 찰진 홍어를 맛볼 수 있는 ‘나주집’, 이국적 풍미의 네팔 요리점 ‘에베레스트’ 등을 주로 갔는데 요즘 몇 곳이 늘었다.
‘창신집’이 그중 하나고 남 대표가 소개해준 전기구이 한방통닭집 ‘대양통닭’이 또 한 곳이다. 갑오징어가 맛있는 ‘무지개호프’와 회집 골목도 전엔 자주 갔었다. 그러고 보니 창신골목시장 자체가 거대한 맛집 타운이다. 그만큼 손맛 좋은 상인들이 많이 몰려 있다는 반증이다. 몇 해 전부터는 베트남 음식점이 한두 개씩 늘어나고 새로운 예쁜 카페 간판도 눈에 많이 띈다. 확실히 활기가 느껴지는 동네로 변모했다.
‘공유창신’이 지식을 채우는 곳이라면 ‘창신집’은 배를 채우는 곳이다 한식을 기반으로 때론 크로스오버한 한양 절충식, 양식 등 음식 스펙트럼이 꽤나 넓다. ‘창신집’은 창신카세라는 특별한 코스요리가 있다. 창신집에서 판매하는 단품요리는 물론 시장 식재료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한우육회, 우럭탕수, 보쌈(보싸메무쵸), 감자전, 복지리, 회무침 등 단품 하나하나 균형감 있는 정성과 맛이 배어 있다. 특히 직접 빚은 6도, 12도짜리 창신막걸리 맛이 일품이다. 물만 넣으면 막걸리가 되는 분말형 궁막걸리로 2023년 서울시 상징 기념품 인기상과 아이디어상을 받은 제품이다.
남 대표는 “막걸리와 창신집의 음식은 창신동의 정서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손님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은 맛과 정성을 담았다”고 말했다.
창신집, 공유창신 모두 정세권에 의해 1920~30년대 지어진 100년이 훌쩍 넘은 한옥 공간이다. 옛 정취를 느끼면서 함께 모여 공부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할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그래서 일부러 문지인문아카데미를 ‘공유창신’에서 진행해 봤고 창신방앗간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에는 시장 반찬가게서 공수한 다양한 반찬이 제공됐고 식재료 대부분을 시장에서 구입한 것으로 하기 때문에 시장 활성화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공유경제가 결국 남 대표가 꿈꾸는 공유창신의 정신이 아닐까.
“창신동은 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는 곳입니다. 좁은 골목길과 오래된 시장,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의 정겨운 교류는 창신동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1분이라도 더 창신동에’라는 슬로건 아래 식당 설거지와 공장일을 병행하며 창신동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신집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곳을 넘어, 창신동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 사랑을 함께 나누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