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墨湖). 늘 그리웠던 바다. 바다는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얼마나 바다가 그윽하고 색이 짙었으면 먹색 물의 도시라 했을까. 물색이 보고 싶었다. 다크블루 위로 터지듯 부서지는 하얀 포말.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안아주는 까막바위.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몸살이 날 것 같아 코레일 앱을 열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하고 기차표를 검색하는데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묵호란 역명이 있다. 묵호란 지명은 혁파나 다름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기차역명으로 당당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묵호는 조선시대 강릉대도호부 망상면 묵호진리라는 동해안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2년 강릉군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됐다. 그만큼 묵호항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강릉이 시로 승격되면서 묵호읍은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함께 동해시 쪽으로 편입됐다. 이후 묵호읍은 동해시 묵호동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1931년 규모 있는 항구로 축항이 시작된 묵호항은 1936년부터는 삼척에서 캐낸 무연탄을 실어 나르면서 규모가 커졌다. 1940년 동해북부선이 개통되면서 묵호항 내 철도가 놓여 물자수송이 한결 쉬워졌다. 1961년에는 영동선이 개통되면서 강릉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됐다.
1960년대 들어서는 삼척의 시멘트와 양양 철광석, 동해안 수산물등을 수출하는 항구로 크게 발전하면서 국제항으로 승격했다. 그간 강릉, 정동진, 삼척 등에 비해 관광 매력도가 뒤졌던 옛 묵호가 동해시 일부로 편입되면서 변모를 시작했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청량리역에 내리니 편리하게도 바로 옆에서 KTX강릉선 환승이 가능했다. 사실 기차를 타고 동해를 가는 건 처음이었던 탓에 잔뜩 긴장했지만 너무 쉽게 환승할 수 있어서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물론 동행인이 의외로(?) 길을 잘 찾은 덕이다.
청량리에서 두 시간 남짓 묵호는 결코 멀지 않았다. 서둘지 않아도 당일치기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고속전철의 힘이다. 동행인은 이미 이곳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큰 행사가 끝나면 묵호를 찾아 묵힌 감정을 쏟아 내고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온다고 했다. 그만큼 묵호란 바다는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주는 시공간이다.
기차는 양평, 횡성, 평창 강릉, 정동진 등 익숙한 도시를 지나 묵호에 닿았다. 정동진부터 묵호 가는 철길은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간다. 동쪽애 머물고 있는 햇살이 검푸른 바닷물 위에 부서지며 반짝이는 윤슬은 압도적이다.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방문자를 맞이하는 동해의 환송 세리머니 같았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감정은 언제나 새롭다. 늘 그랬듯이 기차에서 내리기 전 심호흡을 한번 하고 플랫폼에서는 사방을 둘러본다. 묵호역은 작고 아담했지만 켜켜이 쌓인 시층이 느껴졌다.
첫 방문 예정지인 ‘여행책방 잔잔하게’를 찾았다. 역에서 5분만 걸으면 된다. 다음 목적지인 동쪽바다중앙시장 가는 길이라 겸사로 좋았다. 평일인 화요일이라 당연히 문을 열었거니 했는데, 아뿔싸 매주 화요일이 정기휴무다. 사전 확인을 하지 않은 대가다. 조동범 시인이 얼마 전 북콘서트를 진행했던 곳이라 가는 길에 곡 한번 들러볼 심산이었다. 다음 기회로 남기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동쪽바다중앙시장은 대표적인 동해시 전통시장이다. 1941년 묵호항 개항 무렵에 형성된 전통 있는 전통시장이다. 시설현대화를 통해 장보기가 쾌적하다. 생물, 반건조 등 해산물을 중심으로 생필품 상점까지 다양한 구색을 갖춘 종합시장이다. 묵호를 찾은 관광객 필수 방문코스다. 좁다란 골목 같은 시장길이 정겹다.
묵호의 대표적 관광지는 누가 뭐라 해도 논골담길이다. 묵호역에서 도보 이동이 가능한 이점 때문에 뚜벅이 여행객들은 반드시 이곳을 방문한다. 논골담길은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2010어르신생활문화전승사업’ 묵호등대 담화마을 논골담길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지역어르신과 예술가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41년 개항된 묵호항의 역사와 마을 사람들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마을이다. 산비탈에 조성된 마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아름답다. 논골 1길은 묵호 사람들의 생업과 관련된 담화, 논골 2길은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공간을 이미지화했다. 논골 3길에는 가족과 가정 이야기, 등대오름길에서는 묵호의 풍경을 담은 담화를 그려 넣었다.
골목을 누비다 보면 억척스럽게 살았던 그 시절 어머니의 목소리, 해산물을 지게로 나르던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논골담길은 담화를 통해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고 골목 곳곳에 있는 예쁜 카페는 현재를 인생샷으로 남기는데 조력한다. 이런 감정의 공존은 논골담길을 걷는 방문객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항구도시 묵호의 랜드마크는 역시 등대다. 논골담길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묵호등대와 해양문화공간은 멀리서 묵호바다를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가까이서 묵호바다를 감상하기에는 바다 위로 길을 낸 해랑전망대가 제격이다. 모두 관광 필수 코스다.
묵호 지역 주민들은 이들 관광자원을 활용해 매년 한 여름에 묵호등대논골담길축제를 연다. 올해는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묵호항 수변공원 일대에서 축제를 열고 공연과 체험행사를 펼쳤다.
애초에 묵호행 계획을 짤 때는 10시간 체류하면서 세끼를 감당할 요량이었다. 결론적으로 두 끼 밖에 해결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첫 끼는 점심 무렵 도착해서 묵호에서 가장 유명한 장칼국수 전문점인 ‘오뚜기칼국수’를 찾았다. 오전 11시가 채 되기도 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장칼국수는 강원 영동지방, 특히 강릉이 강세인 향토음식이다. 걸쭉한 고추장 베이스 육수가 특징이다. 영서지방에도 있지만 고추장에 된장(막장)을 조금 섞는 게 특징이다. 같은 영동지역에서도 육수를 해산물이나 고기로 내는 곳이 있다.
유명한 장칼국수 식당은 강릉에 몰려 있지만 묵호에서는 오뚜기칼국수를 손꼽는다. 전형적인 칼국수 면에 무심한 듯 호박을 툭툭 썰어 넣고 한불 세게 끓여낸 국수는 일단 맛있어 보인다. 김가루와 넉넉한 깨소금 고명이 식욕을 돋운다.
칼국수 맛의 완성은 김치다. 이곳 식당 역시 내공에 걸맞은 김치를 내놓았다. 김치 리필은 셀프라서 눈치 안 보고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요즘 같이 ‘금배추’ 시대 손맛 좋은 김치를 원 없이 맛볼 수 있단 것은 곧 넉넉한 인심을 대변한다. 점심시간이 가까이 오자 어느새 모든 좌석이 꽉 찼다. 역시 지역 대표 토속음식 맛집답다. 칼칼한 국물까지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논골담길, 묵호등대, 해랑전망대를 둘러보고 까막바위와 어달항 쪽으로 걸었다. 이곳은 코리아둘레길 해파랑길 구간 중 일부다. 반가운 해파랑길 리본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해파랑길을 개척한 한국의길과문화 홍성운 이사장이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떠올리는 기분 좋은 감상이다.
단단하게 서 있는 까막바위와 동해의 푸른 꿈이 출렁이는 어달항을 휘 둘러보고 두 번째 끼니를 위해 식당을 기웃거렸다. 물론 후보지 몇 곳을 이미 물색하고 갔지만 현장에 가면 변심이 쉬운 게 먹거리다. 어달항엔 유난히 곰치국 전문식당이 많다. 수족관을 가득 채운 어른 장딴지만 한 곰치들이 유유자적 식객을 유혹한다.
‘거북이횟집곰치국’이란 식당 수족관이 가장 풍성하다. 횟집은 횟감이 수족관에 가득 찬 곳을 가란 말이 있다. 그만큼 회전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에서 가득 채운다는 메시지란 것이다. 곰치국은 겨울이 돼야 제맛을 낸다. 12월에서 2월까지가 제철이다. 동해안 대표적인 토속음식으로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다. 겨울이 되면 꼭 다시 오리란 다짐(?)을 하고 ‘부흥횟집’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은 지역 대표 음식점 위주로 갔다. 부흥횟집 역시 묵호 대표 횟집이다. 수족관 없는 횟집으로 유명한 이곳은 또순이란 별명을 가진 김영애 사장이 굳건히 지키고 있다. 2대 50년이 훌쩍 넘는 업력을 가진 식당이다. 김 사장이 직접 어판장서 경매를 통해 횟감을 골라 온다고 알려져 있다. 횟장으로 쓰이는 고추장을 위해 고추도 직접 뛰어다니면서 골라 쓴다고 한다.
모듬회와 물회를 주문했다. 모듬회는 동행인이 좋아하는 메뉴고 물회는 필자가 애타게 그리워했던 강원식이다. 얼마 전 포항식 물회에서 살짝 입맛이 안 맞았던 것을 만회할 심산이었다. 모듬회는 문어와 소라, 부시리, 물가자미, 한치, 숭어, 광어 등 구성으로 제공된다. 계절별 횟감에 따라 구성에 변동이 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순수하게 횟감만 썰어서 나오는 데 소박을 넘어서 단출함의 극치다. 썰어 나온 회가 작다 싶은데 물회에도 사용할 요량인 듯하다. 물회는 새콤한 육수가 깊은 내공을 느끼게 한다. 살얼음이 살짝 낀 육수는 더위에 지친 식객의 영혼을 달래주는 데 충분했다.
얼갈이 물김치, 미역무침, 멸치볶음 등 밑반찬이 모두 입맛에 맞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일어나는 데 몸이 무겁다. 과식을 한 것이다. 결국 계획했던 세끼는 언감생심이 됐고 마지막 관광지인 연필박물관도 휴관이라 대신 구도심을 한참 걷다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길 동행인과 어깨가 아침보다 가까워졌다.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긍정적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