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관심 1 - 나만의 동굴에서 벗어나는 여행
호랑이와 함께 사라진 이후 한동안 마리 소식을 듣지 못했다.
소식이 없어도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았는데
그가 호랑이에게 달려들 때의 그 강단과 눈빛을 보고 나선
더 이상 마리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든
그를 믿어도 괜찮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를 내는 마리의 마지막 장면들을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수많은 전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듣기 싫은 말을 한다는 이유로,
모습이 추하다는 이유로, 그의 과거를 좀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움직임을 함부로 예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움직임이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기에
마리를 챙기고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쭙잖은 것이었는지를
오히려 내가 그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더 이상 내게 부족하고 불쌍했던 어린아이이거나 표독하고 냉랭한 마녀이기보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도전하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져서
다음에 어떤 소식을 전해올지 은근히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아주 짧은 삽화로 내게 소식을 전했는데
12살 정도로 성장한 마리는 도서관에서 아주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삽화는 좀 심히 웃겼는데...
심통 난 아이가 '내가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길 바랬냐' 째려보며 따지는 모습이라니.
뒤로는 엄청나게 수많은 책들이 줄줄이 서고에 정리되어 있었고
그는 그 책들을 뽑아 어지럽게 널어놓고선 나를 향해 '뭐 어쩌라고!' 이러면서
잔뜩 짜증을 내며 책을 던져버리고 있었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읽기 싫으면 읽지 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굳이 도서관에서 내 눈치를 보며 맴돌지 않아도 괜찮다.
내 말에 눈이 동그래져선 그래도 돼?
그러곤 바로 곧장 뚝 소식이 끊어졌다.
그의 짧은 편지에 웃음이 났는데 매번 공부하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저렇게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던 건가.
그리고 또 몇 해 후, 그녀는 16살의 소녀가 되어 내게 소식을 전해왔다.
드디어...
그녀가 원했던 기차여행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린 시절에 스위치백으로 과거에 끌려가버리던 모습과는 달리
객실에 편안히 앉아서 창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던 마리의 모습이 아닌 것도 같았다.
마치 빨강머리 앤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내게 창밖에 쏟아지는 햇살과
지나가는 풍경과 그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넋을 잃고 쳐다보기도 하고
저녁에는 노을이 가득한 하늘을, 밤에는 창밖에 흐르는 불빛을,
그녀는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때로는 신기해하고 때로는 낯설어하면서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나 보다.
매번 혼자 끙끙대던 내안의 동굴을 벗어나 보는 것
마리는 때때로 창밖으로 소나 돼지가 있는 축사가 보이면 완전 흥분해서
이거, 이거 보라며 내게 말하기도 하고
외국인을 보면서는 혹시나 말을 걸면 어쩌지...
자세를 가다듬고 내심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의 불안으로 깜깜한 이불 속에 숨어 혼자 놀던 그때보다
변화하는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기차여행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렇게 다양한 세상이 있구나. 미처 몰랐던.
마리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마치 도서관보다 훨 재밋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려서 진짜 여행을 해보지? 하는 나의 말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불 속이 제일 안전해. 라고 속삭였던 그때처럼
아마도 기차안에 앉아서 창밖으로 보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스쳐가는 불안을 본 것도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 뭐든. 이정도도 충분히 멋있다. 응원해주기로.
그녀의 기차여행이.
그렇게 바라던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꿈꾸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