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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한시사십구분 Mar 31. 2023

만약 내가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나는 왜 끊임없이 반추하고 자책하게 되었을까

난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워서 자책을 하며 며칠을 괴로워했다.

난 욕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욕을 입밖으로는 내지 않는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내가 속으로 욕을 가장 많이 할 때는 나 스스로에 대해 반추할 때인데,

나의 반추는 이불킥의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조롱의 수준이었다.


'아, @#$&! 난 쓸모가 없는 녀석이야. 한심하네, 정말...'


흥미로운 것은, 나의 반추는 대부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기 통제를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때 발동했다.


부분적으로 내 자존감은 꽤 높았다.

난 크지 않은 내 키와 딱히 뛰어나지 않은 내 외모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내게 잘 어울리는 옷과 색도 마음에 들었고, 굳이 유행을 좇으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머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난 보통 수다를 좋아하고 표정이 다양하고 함께 있으면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반추와 끊임없는 반성은 날 성숙한 사람으로 비추어주기도 했다.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늘 잘못을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사과를 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더 넓어졌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더 잘 듣고 더 많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이었고 신랄했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나의 이 자괴파괴적인 습관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만들어진 걸까.


내 과거와 습관 그리고 내 사고의 패턴을 때로는 나 스스로 때로는 상담사와 함께 하나하나 더듬어가 본다.

또한, 나를 생각의 전환을 연습해 본다.


1. 이상과 내 모습 사이의 괴리가 있다. 그리고, 내 이상은 터무니없이 높다.

어느 날 상담사의 대화로 내 마음을 탐구해 보다가, 상담사가 말했다.

'통제'라는 단어가 많이 들리네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갖은 유혹을 이겨내는 절제와 통제력을 가진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스스로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유지하는 사람이었을까.


자기 관리와 통제의 예시는 멀리 있지 않았다. 집에 있었다. 아버지였다.

대학교수이자 학자인 아버지는 자기 관리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다. 

운동과 연구, 수면패턴, 음식 조절까지 아버지는 자기 관리와 루틴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감정기복이 없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내 유년시절은 굴곡이 없이 안정적이고 평탄했다.

비록 형이 대학을 가기 전까지 형과 방을 같이 써야 했던 비교적 작은 집에 살았지만,

우리 집은 부침 없이 잔잔했다. 어느 집에나 있는 투닥거림이 전부였다.


난 그런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안정감을 주는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직업의 길의 가면서 감정의 기복을 느끼거나, 루틴을 지키지 못하고 일을 미루고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난 연구자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웠다.


하지만, 지난번 통화에서 정년퇴임 후에도 글을 쓰는 게 어려워 미루고 미뤄 마음이 불편하다는 아버지의 한탄을 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 중 몇 가지를 선택적으로 취합해 우상화한 건 아닐까.'

'난 30대의 나와 이미 경력이 쌓인 4-50대의 아버지를 비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상향을 만들고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게 묻는다.


2. 어느 정도의 강박과 완벽주의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난 기질과 성장배경 모두에 의한 어느 정도의 강박과 완벽주의가 있다.


내게는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세심함이 있지만, 일을 모든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하지 못할까 봐 시작하지 못했던 경험이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난 능력은 부족한데 완벽주의가 있다'며 한탄했다.


내 부모님 두 분 모두 완벽주의의 성향이 있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으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난 늘 성취에 겸손하고 정체되지 말고 성장하라 배웠다.

시험에서 90점을 받아오면, 다음에는 100점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도록 배웠고,

100점을 받으면 100점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배웠다.


그렇게 학습되었을지 모를 내 어정쩡한 완벽주의에 의한 도드라지는 부작용은 

난 분명 성공과 성취의 경험이 많은데, 그것들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아니, 후려친다.

늘 스스로를 낮추는 나의 모습은 남에겐 겸손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내 자존감에는 약영향을 끼쳤다.


난 왜 잘해내고도 완벽히 해내지 못한 모습을 질책하는가. 내게 또 물어본다.


3. 환경적/상황적 요인이 반추에아주 적합하다.

나의 반추하고 자책하는 습관이 증폭되는 현재의 환경적/상황적 요인들도 생각해본다. 

내가 현재 있는 학계는 긍정적인 피드백 보다는 평가와 부정적 (건설적이라고 말한다) 피드백이 더 많다.


저널에 투고할 경우 논문 리뷰과정은 길고도 힘겹다.

완벽한 논문이란 것을 존재할 수 없는데,

완벽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지적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성격의 일을 하고 있다.


평가에 여기저기 얻어맞는 내 논문을 볼 때면 

어느새 내 논문의 빛나는 부분은 까맣게 잊은채, 퍼렇게 멍든 부분만 바라보며 한숨지을 때가 많다. 


연구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을 곧 책임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혜택으로 비춰질 일에대한 자율성은 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내 어깨에 올려놓는다.


자기관리와 통제가 생산성과 연결되는 연구자의 길에서,

난 늘 완벽할 수 없는 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있어야할 뛰어난 머리도 내게는 없다며 한계를 체감하며 우울감을 느낀다.


난 왜 스스로를 칭찬하며 다독이지 못하는가. 내게 또 다시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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