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리퍼를 신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마루야, 작년쯤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있다.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글이라고 해도 좋겠다.
오늘 우리는 애월항으로 오랜만에 낚시를 다녀왔고, 너는 제법 손바닥보다 큰 쏨뱅이 한 마리와 청볼락 한 마리, 그리고 전갱이 두어 마리를 낚았다. 전갱이는 기티가 먹었고, 우리는 쏨뱅이와 청볼락을 구워서 두어 조각씩 나눠먹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너는 북엇국 두 개를 끓이겠다고 하는데, 케첩을 잔뜩 넣었구나. 엄마는 그걸 또 그냥 지켜본다니. 하지 말라고는 안 하겠다만, 일단 만든 건 다 먹길 바란다. 오늘을 기억하자고, 이 이야기가 오늘부터 시작된 거라고 알 수 있게 적어둔다.
사진관에 있는 책장은 너도 익숙하겠지? 한 권도 꺼내본 적 없겠지만 말이야. 여기 책들은 아빠가 대학생일 때부터 차곡차곡 모은 것들이다. 상하이에 있을 때도 책은 짊어지고 갔고, 버리지 않았고, 가지고 돌아왔지. 막상 제주로 온 다음부터는 새 책을 추가한 게 많지 않네.
어느 날부터 생각했어. 너에게 주는 책장이 되겠구나. 생각해 보면, 아빠의 독서는 이른 편은 아니었고 빠른 편도 아니었단다. 고등학교 수능을 마친 다음에야 장편소설을 처음 읽었고, 군대에 있을 때 소위 말하는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문장을 씹어 읽는 편이라 남들보다 한 권을 더 오래 들고 있었다. 늦은 독서였지만, 지금 아빠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20, 30대 동안 아빠가 읽었던 책들이란다. 그 책들에 기대서 세상을 배우고 또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 기둥을 박아 넣고 서 있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너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아빠가 하는 이야기들을 다 소화할 수 없고, 조금 더 자란 뒤에는 아빠의 이야기가 좀처럼 들리지도 않겠지. 그리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조언을 해주기란 여러 이유로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게 이 책장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혹시 네가 닥친 상황에 조언이든 길잡이든 휴식이든 도망이든 그 무엇이든 필요할 그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책 안에서 작은 불빛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그리고 좋은 책으로 채워진 사람은,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언제쯤의 너에게, 어떤 상황의 너에게 도움이 될까를 가려 적어보려고 한다.
작년부터 하겠다고 생각하고도 이제까지 못 했던 것은, 큰 작업인 걸 아니까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있고, 긴 작업이 될 테니까 처음부터 틀을 제대로 만들고 가야 한다는 강박도 조금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영영 못할 것 같아. 그래서 생각을 조금 바꾼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책상 앞에 앉아 비장하게 쓰는 대신, 슬리퍼를 신고 마당을 산책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지금 책장에 꽃아 둔 책들은 무작위다. 이 순서를 그대로 쓰자. 대충 한 칸에 마흔 권쯤이고, 30칸 좀 안 되니까 1200권 안팎이겠다. 더러 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책들도 있을 것이고, 조금이지만 중간에 추가되는 책들도 있겠다. 거의 다시 읽어야 하는 책들도 많으니 10년도 더 걸릴까. 때로 잠깐 또는 오래 멈추기도 하겠지만 여기 있는 책장을 한 번 훑고, 네게 전해줄 만한 책장으로 정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마. 약속할게.
자, 가 보자. 마당을 걷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