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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Feb 03. 2017

늙은호박범벅, 온 가족이 오순도순 둘러 앉아 먹는 맛

  작년 10월 말, 아내가 SNS로 늙은호박 사진을 보내왔다. 텃밭 정리하려고 조선호박 넝쿨을 치우다 보니 몰래 숨어있는 늙은 녀석이 두 개를 찾았다네. 집에 가져갈지 다른 사람 줄지 물었다. 저걸 또 어쩌나 싶어 망설여지긴 했지만 너무 잘 생겼더만. 크고 분 많이 낀 녀석으로 하나만 가져오라고 했다. 부엌 한 쪽에 모셔두니 그럴싸했다.  

잘 생겼다




  해 넘기면 안 될 것 같아 12월 어느 여유로운 주말 오후에 큰 맘먹고 해체 작업 실시. 그 큰 녀석을 낑낑거리며 잘라서 씨 발라내고 껍질도 벗겼다. 그리고는 깍둑썰기. 우선 제육볶음에 넣어봤는데 이런... 향이 너무 강하다! 단호박처럼 이런저런 요리에 넣어 먹으려고 했는데 망했다. 이제 어떻게 저걸 처리하지. 역시나 만만한 곳은 냉동실.      

  



  이후로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 선명한 오렌지색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이 들었다. 몇 년 동안 묵혀두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리라는.      


  힘들게 가져온 아내에게도 미안해 틈날 때마다 늙은호박을 이용한 음식을 찾아봤다. 늙은호박전, 늙은호박죽, 늙은호박김치, 늙은호박 고등어조림... 딱히 당기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끔 들르는 블로그에서 마음에 딱 드는 음식을 발견했다. 늙은호박범벅!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호박죽도 시큰둥해하던 사람이  웬 호박범벅이냐며 면박을 주네. 그래도 호박죽과는 좀 다를 듯했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런 음식 있지 않나. 딱 보는 순간 저 정도면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고, 해 놓으면 맛도 있겠다 싶은 그런 음식.     

 

  요리법도 간단했다. 물 자박하게 붓고 삶아 찹쌀물 풀고 간하면 끝. 강낭콩이나 팥도 삶아서 넣으면 더 좋다네. 주말에 마트 들렀다 팥도 좀 샀다.      




  준비는 다 됐으니 한번 만들어볼까. 먼저 팥 삶기. 이것도 뭐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물에 불려 하루 정도 냉장고에 뒀다가 한 번 삶은 물은 버리고(그래야 쓴 맛이 가신단다) 다시 삶으면 끝. 마침 굴러다니는 고구마도 있어 같이 삶았다.      

약간 많이 삶은 듯

  그럼 주재료인 호박을 삶아 보자. 냉동실에 고이 모셔둔 녀석을 꺼내니 10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물 넉넉히 붓고 40여분 정도 삶았다. 처음 끓기 시작하자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나서 약간 걱정했지만 20분 정도 지나 충분히 익자 달콤하고 구수한 향이 올라왔다. 다행.            

고급진 단맛이 올라온다

  푹 익은 녀석을 믹서기에 곱게 갈았다. 다시 냄비에 붓고 찹쌀물 풀어서 농도 맞췄다. 색깔 참 곱네. 삶은 팥과 고구마, 그리고 냉동실에 있던 삶은 밤을 넣었다. 조청이랑 소금도 약간 넣어줬다. 한 소끔 더 끓였다.


  그릇에 담아 놓으니 그럴싸하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한 입 먹었더니 스르르 눈이 감긴다.  크림처럼 부드럽고 꿀처럼 달았다. 씨~익 웃음이 났다.  삶은 고구마 씹는 맛도 괜찮고 충분히 익은 팥은 구수했다. 예상보다 훨씬 맛있는네!  자주 비교되는 식재료인 단호박보다 더 고급스러고 깊이 있는 맛이랄까. 정말로 다행이다. 그때 너무 무겁고 처리하기 힘들다고 와이프한테 가져오지 말라 했으면 어쩔 뻔했나.      

보기만 해도 몸이 훈훈해진다

  그러니 텃밭에 호박 심으신 분들은 넝쿨 너무 자세히 살펴보지 마시고, 실수 반, 고의 반으로 호박 한 두 개 남겨두시라. 알아서 잘 자라고 잘 늙는다. 처리할 때 좀 힘들지만 추운 겨울 주말에 간식으로 이만한 게 없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다 보면 절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고마운 맛이다.       




   정신없이 먹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집 7살 꼬마도 그릇에 코박고 야무지게 먹고 있다. 흐뭇했다. 역시 애들이 맛있는 건 젤 잘 안다니까.  

     

   “딸, 아빠가 만든 호박범벅 맛있어요?”

   “응. 완전 맛있어요. 완전 달아요. 근데...”

   “근데?”

   “팥은 너무 많이 안 넣었으면 좋겠어요.”

     

   흐흐흐. 다음번에는 강낭콩을 삶아서 넣어 볼까, 아님 온 식구가 같이 새알을 만들어서 넣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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