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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잇나잇 Jan 22. 2024

'눈'이 녹으면 뭐게?

긴 긴 겨울의 끝. 

노르웨이 오슬로에 사는 나. 

이번 해의 겨울은 정말이지 눈이 '억수로' 쏟아졌다. 나름 노르웨이 생활 4,5년 차를 지나가는 중인데 이렇게나 겨울이 추운 적도 없었고, 눈이 이렇게나 쏟아진 적도 없었다. 

전에는 "노르웨이 많이 춥지?"라고 묻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별로 안 그래. 한국 겨울이랑 비슷해."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이번 겨울은 정말이지 '겁나' 추웠다. 



12월 들어 서부 터는 거의 매일 영하 10도 이하였고, 정말 심했던 날은 영하 20도를 찍은 날도 있었다. 내 생애 한 번도 영하 20도라는 숫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가 하고 한번 나가봤더니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냥 뺨이 조금 칼날에 베는 기분이랄까.' 정도였다. 물론 노르웨이 겨울의 필수품인 내복, 스웨터, 부츠, 롱패딩, 울장갑, 울모자는 착용하고. 



눈은 또 어찌나 쏟아지는지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펑펑 눈이 옵니다.' 이걸 며칠을 계속했다. 그러니 발코니의 지붕은 무용지물. 눈이 발코니 안으로까지 들어와서 야외 의자에 '대만 카스텔라'처럼 두꺼운 눈이 쌓여 녹질 않았다.

잠시 또 소강상태를 보이나 싶었는데 1월 초가 지나가니 또다시 눈이 그렇게 쏟아지더니 눈 잘 치우는 오슬로마저도 눈을 제때 치우지 못해 버스가 미끄러지고, 버스가 취소되고, 지하철이 운행을 안 하고 난리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일기예보에 빨간색이 떴다! 주식창만 빨간색이 좋은 게 아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영상 날씨인가! 엄청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부터 똑, 똑, 눈이 녹아 물이 되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잠에서 깨서 나도 잠에서 잠시 깰 때면 또르르르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게 반가웠다. 

아침에 일어나 정말로 바닥의 눈이 다 녹아 미끌미끌 마치 아이스링크장처럼 된 길을 보면서 문득, 아주 오래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어느 교실, 초등학교였을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라는 질문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물"이라고 대답하는데 그중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봄"이요. 



아, 그 한 단어로 내 맘을 눈녹이듯이 녹였다. 그때. 그렇게 아주 오래전 읽었던 글이 내 머릿속에 아주 강하게 기억되고 있었고, 오늘 두 달에 걸친 영하 10도의 추위와, 20센티미터가 넘는 눈이 녹는 광경을 보는데 그 글이 다시 떠올랐다. 



그 당시, "와, 어떻게 저런 대답을 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단순히 감수성이 풍부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어떤 사람들이 저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오늘, 어린이집에 아기를 데려다주고, 눈이 녹아 물바다가 된 길을 저벅저벅 걸어오며 문득 생각했다. 



'눈이 이렇게 녹는 걸 보니 이제 봄이 오려나보다.' 진짜 봄이 오기까지, 아직 네 번 정도의 겨울이 더 남은 걸 알지만 그래도 가슴이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아! 아! 아! 



'그 아이, 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긴 겨울이 끝나, 봄이 되길 기다리고 있으면 눈이 녹으면 뭐가 될까 라는 질문에 봄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거구나!' 



어떤 생각, 행동은 자신의 힘든 과거 경험으로부터 교훈이나 배움을 얻었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할 표현, 깨달음은, 그렇게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거친 사람들만이 갖게 되는 훈장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완전히 나쁜 일, 힘들기만 한 일은 없다고 믿는다. '봄'이라고 대답한 그 아이는 그런 '겨울'을 지나고 있었을까. 그렇게 그 아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에게 '봄'이라는 한 단어로 큰 감동을 전해줄 수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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