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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Oct 08. 2024

문득, 아빠가 그립습니다

사랑하고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을 담아 아빠에게

나에게 아빠란 어떤 모습인가 떠올려본다

아빠의 모습은 작은 체구지만 목소리에 힘이 있으셔서 쩌렁쩌렁했다  

눈도 쌍꺼풀이 눈썹도 짙은 코도 오뚝하고 귀도부처님 귀처럼 길고 크신 잘생긴 미남형이시다

요리도 곧 잘하시는 무뚝뚝해도 다정하셨다

직업군인이셨으나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다섯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사회에 나와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는  벨트 공장을 크게 하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식구들을 먹여 살리셔야 했고 서른 즈음 큰 이모를 통해 엄마를 소개받았다

할머니는 아빠와는 다르게 키가 큰  엄마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렇게 결혼하여 삼 남매가 태어났다

장남에 딸린 식구가 여럿이다 공장은 불에 타서 없어져버렸다

언니와 내가 일곱, 다섯 때쯤 대관령에 가서 소를 키우셨다고 하셨다

소를 팔고 다시 서울로 오면서 건축미장일을 하시며  셋을 키우셨다

어느 날, 담배로 오랫동안 기침을 달고 살던 아빠에게 할머니는 건강검진을 권하셨다

호흡기 관련 약을 받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호흡기가 안 좋으니 호흡기 약이라도 처방받고자 간 병원에서 위암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

큰 병원에 검사 한번 더 받아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서울에서 진료받기 원했다

위암에 좋은 큰 병원은 서울에 많고 진료를 받기 시작하면 서울에서 우리와 할머니를 볼 수 있어서다

예약이 가능한 서울 병원 중 내가 알아본 병원으로 정했다







늘 큰 목소리에 작게 말해도 알아 들어요 했더니 자기 귀가 잘 안 들려서 그렇다고 하셨다

아빠는 무뚝뚝해 보여도 우리에게 키우던 닭을 잡아 옻을 넣고 옻닭 요리를 해주셨다

무와 콩나물을 넣고 무밥을 만들어 주셨었다

가끔씩 술에 취한 모습으로 들어오실 때면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우리 주려고 사 오신 삼베과자나 치킨이었다

담배도 좋아하시고 술도 좋아하시기에 담배도 술도 거리가 먼 나는 서먹서먹했다

작은 체구에 문경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하셨다

몸보다 무겁고 커다란 가방을 멘 뒷모습을 보며 마중했더랬다

음식도 많이 못 드실 때도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했다

서울을 오가며 가끔씩 마주치면서 배웅할 때 잡았던  투박한 손은 따뜻했다




처음 결과를 들으러 가던 날도 아빠는 담배 한가피를 한대 피우셨다 의사 선생님은 담배를 피우셨네요 하셨다 아빠의 옷에 밴 냄새로 바로 아셨다 그러면서 호흡기가 안 좋아 수술도 어렵다며 수술받고 싶으면 금연을 해야 가능하다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어찌나 겁을 주시던지 수술하는 것도 망설였었다

혹여나 수술 후 못 깨어날까 겁이 덜컥 나서다

어렵게 수술을 결정하고 아빠는 금연을 시작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금연에 금연패치 처방을 해주시고 수술 며칠 전부터는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폐활량에 좋은 호흡기 기구로 매일 더 좋아지게 열심히 부셨다

수술이 아주 짧게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오래 하게 되면 폐에 무리가 가서라고 했다

그 후 두 차례의 항암을 받으셨다

거부 반응으로 얼굴도 까매지고 입술과 목안이 바짝 마르셨다 음식까지 못 먹어 버틸 체력이 없어 보였다

항암을 몇 차례 받으며 몸무게가 30킬로 가까이가 되셨었다.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앙상해져 힘겹게 버티는 모습에 항암을 포기하자며 말렸다

자신을 살린 사람이 의사 선생님이신데 의사 선생님이 허락해야 중도 포기 할 수 있지 않겠냐며 버티셨다

그 후 결국 의사 선생님께서 중단하잔 말이 나오셨고 다시 몸이 회복되기까지 몇 개월 시간이 걸렸다

아빠의 나머지 인생은 하늘이 주신 선물 같았다  

수술 후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여러 차례 문경과 서울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셨다

그렇게 5년을 잘 버티셨다







완치 판정을 받고 코로나가 유행일 때도 잘 견뎌내셨는데 안심하고 방심할 때쯤이었다

저혈압으로  두어 차례 쓰러지면서 응급실이 계시게 되었다

병원에서 코에 줄이 걸렸다 식사도 거부하셔서 코로 영양분을 흡수하고 있었다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다리의 근육도 서서히 빠져 걸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6개월 정도 병원에 계시면서 언니와 번갈아 2주에 한 번씩 주말마다 내려갔다

문경을 가면서 조금 더 곁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






더 자주 뵐 생각에 서울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할머니와 친척분들이 방문했다

아직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더 이상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못 내셔도 수척했어도 우리 목소리도 잘 들으셨고 건강해 보였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아빠의 건강한 모습이 되었다

안심하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급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오늘 넘기기 어렵다며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언니랑 나는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각자 집에서 출발하니 나는 지하철로 갔고

언니는 택시를 탔다

언니와 나는 10분 정도 차이로 도착했고

마지막, 아빠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목놓아 울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얼굴 머릿결을 연신 쓰다듬었다

아빠의 투박한 손, 앙상해져 팔처럼 가느다랗고 걸을 수 조차 없어진 휘어진 다리를 매만졌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아직 살아계시다

잠들어 계신 거뿐인데

의사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마지막 시간 몇 분을 말씀하셨다






보고 싶어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연신 눈물이 흘렀다

계속,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빠~ 보고 싶으면 어떡해

아빠의 감은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내 말이 들려? 아직 듣고 계시리라

아빠가 가끔씩 부르시던 아리랑 노래를 찾아 틀었다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언니와 계속 되풀이했다


마지막 아빠는 평온한 모습이셨다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작은 아버지는 마지막손을 지긋이 잡으셨다


이제는 납골당에 계신 아빠가 꿈에서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믿기지 않다


사랑은 주는 거라고 늘 말씀하시던 아빠

나는 아빠에게 많은 사랑을 드렸던가

외롭게 하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아쉬운 마음이 드는 밤이면 잠이 안 온다

그때 더 좋은 말과 좋은 노래들을 들려 드렸어야 했는데 왜 아빠와 많은 시간을 함께 여행이리도 다녔어야 하는데 등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가끔 아빠가 생각나면 병원에서 담아둔 동영상을 본다

아직 아빠에게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 마음 한편에 아쉽고 미안함이 남아버렸다

아빠 태순이와 함께 잘 있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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