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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잎사귀다

2월 18일 주제 - 꽃

by 생각샘

오늘 아침 우리 성당 부주임 신부님이 새로운 발령지인 명동성당으로 이동하셨다. 마지막 어린이미사에서 주일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주일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신부님께 튤립을 한 송이씩 드렸다. 모루로 만든 겨울꽃이었다. 신부님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아이들이 많이 울었다. 신부님도 우셨다. 신부님은 울보라 잘 우신다. 대문자 F다. 아, TMI.

감동적인 이 행사를 기획한 교감선생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꼬박 이틀 동안 모루 철사로 80송이의 튤립을 만들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금손이다. 졸업식이며 입학식 등 각종 행사마다 풍선으로 장미꽃, 데이지꽃, 튤립을 만들어 아이들이 한 아름 품에 안고 가도록 한다. 봄에는 활짝 핀 개나리를 종이로 만들어 게시판을 전시했는데 정말 생화 가지를 꺾어 온 줄 알았다. 어버이날은 주름지로 커다란 카네이션을 만들어 주임신부님께 드렸는데 아직도 신부님 직무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정말 다들 금손이다. 나만 빼고. 이미 여러 번 밝힌 바 있지만 나는 똥손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꽃잎을 만드는 동안 나는 꽃받침만 만든다. 풍선으로 꽃을 만들 때는 꽃대를 만들고, 모루로 꽃을 만들 때는 잎사귀만 만든다. 그게 더 만들기 수월하다.


잎사귀만 만든 나는 평생을 잎사귀처럼 꽃 밑에 숨어있으려고 애썼다.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아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학교나 회사를 다니면서 상을 받을 일이 생겨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게 싫어 상도 받기 싫었다. 그냥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으로 타고나서 그런 줄 알고 살았다. 극 I 성향인 내가 정말 이해 안 되는 캐릭터는 한상남 작가의 동화 <단추와 단춧구멍>에 나오는 단춧구멍 같은 사람이었다.


단춧구멍은 단추를 미워한다. 사람들이 단춧구멍에 관심이 없는 건 단추가 자신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단춧구멍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단추가 자신의 길을 막고 있다고 원망한다. 나는 반대였다. 나 대신 나서서 나를 가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다. 그러면 내가 주목받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알았다. 사람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소심이’, ‘내성적’, ‘극 I’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회불안장애’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장애.


장애(障礙)는 신체나 정신에 기능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자신 주변의 세상과 소통하거나 특정 활동을 하기에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말한다.
<출처 - 위키백과>


장애구나. 나는 제 기능을 못하는구나. 나는 세상에 어울리며 특정 활동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주눅이 들었다. 잎싹의 말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잎싹은 황선미 작가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오는 주인공인 닭이다. 잎싹은 청둥오리인 나그네에게 자기 이름을 왜 잎싹이라고 지었는지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잎사귀는 꽃의 어머니야. 숨 쉬고, 비바람을 견디고, 햇빛을 간직했다가 눈부시게 하얀 꽃을 키워내지.
아마 잎사귀가 아니면 나무는 못 살 거야. 잎사귀는 정말 훌륭하지.


숨고 싶은 나의 본능을 누군가는 장애라고 부르겠지만 이젠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숨어 끈질기게 선한 일을 하며 꽃을 피워낼 테다.

나는 훌륭한 잎사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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