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주제 - 지우개
방학 때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글쓰기 특강을 했다. 평소 자신의 글을 살펴보며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시간, 늘 빼먹고 안 쓰는 서론을 다양한 방법으로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사물 글쓰기 시간이었다. 사물 글쓰기란 일상 속 사물을 주어로 해서 특정한 사물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방법이다. 만약 사물에 인격이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낄지 상상하며, 그 사물과 주위 환경을 관찰하고 글을 써보는 시간이다.
연필, 가방, 침대, 안경, 핸드폰, 양말 등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는 사물을 쪽지에 적어 하나씩 뽑아 들고 써보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뽑은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조마조마했나 보다. 쪽지를 뽑고 괴성을 지르는 아이, 환호를 하는 아이, 신음을 내는 아이, 친구의 쪽지를 몰래 훔쳐보는 아이. 제각각 개성을 드러내는 아이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논설문을 쓰라고 하면 몸부림을 치던 아이들이 얼마나 초집중을 하고 글을 쓰는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다 쓴 글을 돌아가며 발표했는데 그중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글이 오늘 주제와 딱 일치한다.
<지우개의 일기>
나는 지우개다. 오늘 문구점에서 어떤 사람이 나를 샀다. 그 사람은 무엇을 위해 나를 샀을까? 너무 궁금하다.
아니, 어떻게! 나를 산 지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비닐 옷을 벗기고 바로 종이에 문지를 수 있는가! 첫날부터 머리에 검댕이를 묻히고 어두컴컴한 필통 안에 던져졌다.
다음날이다. 나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아침을 맞았다.
학교였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느꼈어야 했는데...
나는 첫 쉬는 시간에 지우개 놀이에 참가했다.
설마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내가 저런 늙다리 지우개를 상대로 질 수는 없다.
하지만.
싸늘하다.
가슴에.
샤프심이 날아와.
꽂힌다.
얇고
길고
단단한 샤프심들이
한 친구 샤프통에서 하나
다른 친구 샤프통에서 하나.
그래도 괜찮다.
나는 샤프심보다 강하니까.
그. 런. 데.
나는 느꼈다.
누군가 0.7 샤프심을 꺼냈다는 것을.
0.7 샤프심은 지우개들 사이에서 아프기로 유명하다.
나는 하나를 간과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샤프심을 맞았다.
그래도 나는 모든 것을 견디고 지우개 싸움을 제패했다.
또 다음날이다. 나는 너무 더러워진 나머지 주인에게 버림받았다.
괘씸한 주인은 나와 내 단짝인 연필을 버리고 볼로 시작하고 펜으로 끝나는 녀석을 쓰고 있다.
나는 이대로 끝나는 걸까? 지금 필통 안에 있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겨야겠다.
아직 삼일밖에 안 지났다.
이 글을 쓴 친구는 평소 아이들이 대문자 T라고 말하는 친구인데 풍부한 상식과 논리적인 반박으로 토론을 휘어잡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이 글을 발표할 때는 아주 느릿느릿, 한 템포씩 쉬어가며 발표를 하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친구들은 책상에 엎드려 깔깔대고 웃느라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렸다. 특별히 이 글의 작가님에게 허락을 받고 글을 공개한다.
이렇게 사물을 주어로 두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사고력도 성장한다고 한다. 진짜인가 보다. 대문자 T 친구가 이토록 지우개의 정서에 공감하며 지우개의 일상을 흥미진진하게 표현하다니! 발표를 들은 친구들도 나도 배꼽을 잡으며 들으면서도 감동이다. 오늘은 <지우개의 일기>와 잘 어울리는 동화책 2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권은 제8회 푸른문학상을 받은 유순희 작가의 동화인 <지우개 따먹기 법칙>.
다른 한 권은 창비 어린이책 수상작인 조규영 작가의 동화인 <지우개 똥 쪼물이>이다.
<지우개 따먹기 법칙>은 10개의 지우개 따먹기 규칙을 통해 상보와 준혁이가 엎치락뒤치락 우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우개 똥 쪼물이>는 유진이가 만든 지우개 똥이 겪는 모험을 사물 의인화 방법으로 보여주는 동화이다.
언젠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 이런 동화도 꼭 써봐야겠다.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