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에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첫 근무지는 영동이라는 군청 소재지였다. 거기가 어디인지 지도를 보고 찾아갔을 정도로 들어본 적 없는 도시였다.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영동역에 내려 걸어가는 길,
'여기는 길가에 전부 감나무네.' 내 눈에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보였다. 영동은 감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큰언니와 복덕방이란 데를 가서 셋집을 얻었다. 직장에서 걸어 10분이면 족할 거리. 처음 그 집을 봤을 때 무엇보다 정원이 맘에 들었다. 한쪽에 밭이 있어서 블록 담을 둘러친 그 집은 동네에서 흔치 않게 아담한 정원을 갖추었다.
대문 안에는 두 채의 집이 있었다. 한쪽으로 자리한 양옥집은 비스듬한 계단을 1층 높이만큼은 올라가야 1층인 그런 집이고, 옆으로 별채처럼 보이는 집은 정원보다 살짝 낮게 지어서 넓은 돌계단을 네댓 개 걸어 내려가도록 만들어진 단층 구조다. 별채에는 정면의 방 두 개에 주인 할머니 부부가 계시고 오른쪽에 붙어있는 방 둘 중 하나가 내 셋방이었다.
1층 집이면서도 2층 집 같은 본채와, 1층 집이면서도 반지하 같은 별채.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채였다. 별채는 입구가 무척 넓어서 햇빛이 밝게 들어왔고 따뜻했다. 심지어 아늑하기까지 했다.
첫날 큰언니는 무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어묵 국을 끓여주고 갔다. 밥은 전기밥솥이 했지만 반찬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 걱정이었다. 언니가 넷이나 있어서였는지 집안일은 청소밖에는 할 줄 몰랐다.
이제 막 밥벌이는 시작했지만 온전히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덜떨어진 셈이었다. 처음 피워보는 연탄불은 갈아줄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고 허옇게 죽어간 연탄재를 보면 울고만 싶었다. 살림살이는 5인용 전기밥솥과 식기 정도. 살림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셋째 언니가 왔고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살림도 장만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에서 만난 사람을 저곳에서도 만나는 게 보통이었다. 우리는 중앙시장 철물점에서 작은 밥상과 그릇들을 사고 채소가게에서 장을 봐서 먹을 것을 만들었다. 그제야 온기가 느껴지고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언니와 저녁을 해 먹고는 라디오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사무실에서는 막내여서 모든 게 배워야 할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좋은 선배와 상사들을 만났던 것 같다. 어리고 세상살이 처음인 진짜 새내기. 너그럽게 이끌어 주신 선배들이 있어서 바쁘지만 즐거웠다.
그 봄, 일요일 아침나절은 마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쪼그리고 앉아서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며 풀을 뽑고 물을 주었다. 그때 유행하던 민혜경 씨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쓸쓸하고 달큼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정원에서의 한나절은 일상에 생기를 채워주는 시간이었다. 수선화 구근이 긴 대궁을 밀어 올렸고 그러면 멀지 않아 꽃사과나무는 붉고 흰 꽃들을 탐스럽게 매달기 시작했다.
허리가 굽고 마르신 주인집 할머니는 계란 노른자에 들기름 한 숟가락을 넣은 조그만 종지를 들고 울타리 밖 텃밭으로 가곤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을 하면 꼭 이걸 먹어야 한다잖아.”하면서 말이다. 나는 반찬 만드는 건 자신이 없지만 부침개는 할 줄 알았다. 밀가루 반죽에 파릇한 쑥을 넣어 쑥 전을 부쳤다. 봄볕이 들어오는 기다란 할머니네 마루에 앉아서 우리는 젓가락으로 전을 찢어먹으며 라디오를 들었다.
본채는 ‘전문음식점 O정’이라는 간판이 달려있었다. 평일에는 손님들이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휴일이면 멋진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본채로 들어가기도 했다.
가을이 왔을 때, 나는 방의 미닫이문을 떼어내서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 문고리 부분에는 멋을 내려고 코스모스 한 송이를 넣고 꽃잎이 비쳐 보이도록 창호지를 덧발라 주었다. 처마 아래 그늘에 세워두면 통통 소리가 날 만큼 팽팽하게 말랐다.
추워지기 전, 이불 홑청을 빨아 새로 시치기도 했다. 이런 건 다 집에서 엄마랑 해봤던 거라 혼자서도 잘할 수 있었다. 할머니네 마루가 넓으니 거기에다 이불을 쭉 펴놓고 한 땀 한 땀 떠가고 있으면 “아이구, 어린 아가씨가 이런 걸 다 할 줄 알어?” 하시며 할머니도 큰 바늘을 가지고 나와 함께 꿰맸다.
그 집에서 일 년을 살았다. 할머니 아들 네가 별채로 들어오며 집을 비워주게 되었다. 어쩌다 거리에서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서로 반가웠다. 얼마 후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언젠가는 큰 통이 담긴 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돼지를 키운다고 했다.
“할머니, 돼지를 어디에다 키워요?”
“밭에, 돼지우리를 만들었어. 쪼맣게. 몇 마리 키와 볼라고. 내 심심해서.”
할머니는 식당에서 나온 잔반을 받아 돼지 밥 줘야 한다며 서둘러 가셨다.
좀 더 지나고, 길에서 할머니를 만났을 때는 전과 달리 부쩍 약해진 것 같았다. 눈빛도 또렷하지 않고 힘들어 보였다. O정 운영하던 아들 사업이 잘 안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까지 물어보진 못했다. 나도 동료와 함께 외근 중이라 그렇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그 후로는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3년 동안 근무했던 그곳을 떠나 대전으로 전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좀 더 어른이 되고 그 시절이 떠오를 때면, 지쳐 보이던 할머니를 마주친 날 따뜻하게 손이라도 잡아드리고 밥 한 그릇 사 드렸어야 했던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세놓으며 사는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밤늦도록 들린다면, 쌍화탕이라도 한 병들고 가서 문 열어 봐야 한다는 것도 나이를 먹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전근을 갈 때마다 여러 차례 셋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첫 직장이라서 모든 것이 처음이고 추억도 많아서였겠지만 마음에 남는 곳이다.
봄볕이 환하게 들던 할머니네 마루, 울타리 안에 꽃사과나무가 화사했던 그 봄이 생각난다. 내게는 감나무 연한 이파리 같던 청춘의 한때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