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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가든 Apr 04. 2021

가르침은 사절합니다

그는 나와 석 달을 함께 일했다. 나를 돕는 역할을 잘해주었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던 경력단절 여성이다. 회사에서는 가능하면 9시~4시 근무를 해줄 것을 원했다. 유치원생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출근시간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괜찮다면 10시~5시도 될까요?” 그는 사정하듯 말했다. 인턴인지라 사수인 나의 책임 하에 탄력시간 근무가 가능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하루 이틀 아니고 일 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일해야 한다. 아침마다 아이 때문에 쫓기는 것은 서로 불안한 일이다.  정신없는 출근에 늦는 날이 잦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편하게 출퇴근하는 것이 업무 효율면에서나 나와 그의 정서적인 관계에서도 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해본 터라 얼마나 고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애매한 나이 사십이 가장 힘들었다.


젊은 사람이니 잘할 듯싶어 숫자가 가득한 서류 파일을 검토해 달라고 주었다. 복잡해 보이지만 내용은 단순한 것이어서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옆을 지나다니면서 슬쩍 바라보니 그가 하는 방법대로라면 헷갈릴 것 같았다. 내 방식을 설명해 주며 이 방법은 어떠냐고 귀띔했다. 

“그냥 제 방법으로 한번 해볼게요. 그게 편할 것 같아요.”  젊은이다운 솔직함이었다. 
내 경험상 자료의 양이 적을 때는 좋으나, 많을 때는 놓치는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자신 있어하니 그러라고 했다. 
이틀이면 다 할 수 있겠냐고 나름대로 넉넉히 시간을 제시했다. 약속한 이틀이 다가오자 그는 자꾸 헷갈리니 시간을 좀 더 줄 수 있는지 물었다.


4일, 5일이 지났다. 자기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자다가 꿈에도 엑셀 파일이 보인다며 미안해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꼼꼼히 다시 해보라며 시간을 더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해결이 안 되자 그는 내가 제시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자기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움이 못돼드리는 것 같다며 자책했다.


그에게 부족한 건 능력이 아니었다. 경험자를 믿어보는 약간의 신뢰가 필요했을 뿐이다. 결국 열흘 만에 일을 끝냈다.

"너무 죄송하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어느 직장에서도 이렇게 대해주신 적은 없었어요."
    
내 입장에서는 그가 나를 돕는 역할이라서 온전히 부담스러울 일은 주지 않았다. 그 일 말고도 그에게 줄 업무는 많고도 많았지만 인턴 청년을 다그쳐가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켜볼 수 있었고 스스로가 선배의 경험을 인정하길 기다렸다.  
내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자기주장은 하지만 괜찮은 젊은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인턴이지만 함께 일할만하다고.

열흘 만에 첫 업무를 마무리 한 날, 점심으로 순대국밥을 함께 먹고는 수원천 길을 걸었다. 봄 햇살에 개울물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짐을 털어버린 그의 마음도 그랬을까. 
그 후로 그는 한마디 하면 알아서 열 일하는 사람으로 첫 실수를 만회했다.

지금은 내가 그곳을 떠나왔다. 그는 가끔 카톡이나 전화로 안부를 물어온다. 그때 너무 미안하고 감사했다고.  나에게는 별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한테도 받아보지 못한 기다리고 인정해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조금은 살아봤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면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일까. 그래서 지나치게 간섭하고 많이 말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은 귀를 막고 안 듣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더 안다고 생각해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몇 년 전, 강남에 있는 어떤 교육장에 갔었다. 주최 측에서는 참가자들을 위해 약간의 다과를 준비했다.  점심이 막 지난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꾸벅꾸벅 졸렸다. 억지로라도 잠을 깨려고 쉬는 시간엔 뭔가를 마시거나 먹게 됐다.  별다르지 않은 냉온수기였는데 그날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해보다가 방법을 알았고 물을 받았다.  
내 뒤에 온 여성이 나처럼 헤매는 걸 보고 '이렇게 하면 되던데요'라고 말해줬다. 그 여성이 뭐라 웅얼거리며 물을 받아 갔다.  별걸 다 참견한다는 투였던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감사의 표현은 분명 아니었다. 
당황스러웠고 살짝 불쾌했다. 내가 고생했으니 당신도 그래 봐라 하고 내버려 뒀어야 했던 걸까. 
어쨌든 그가 원하지도 않은 것을 준 셈이니 나의 주제넘은 간섭이었다. 

도움을 원할 때가 아니라면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삶에는 각자의 철학이 있고 방법이 있다는 것, 그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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