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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가든 Apr 06. 2021

분꽃

분꽃은 저녁에 핀다. 밥을 먹으러 집으로 오는 시간에 피기 시작한다. 어스름이 깔리는 마당가에서  마주치는 꽃이다. 여름 꽃이지만 더운 시간에는 볼 수 없다. 야간 근무자처럼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활짝 핀다.


줄기와 잎이 군더더기가 없다. 대궁과 줄기와 잎과 꽃, 있을 것만 있다.  한해살이풀 꽃 치고 줄기가 무성하고 꽃도  화사하다. 제대로 차려입은 여성처럼 단아하다. 꽂진 자리에는 꽃만큼이나 선명한 씨가 남는다. 꽃 하나에 쥐눈이콩을 닮은 씨가 한 개다. 까맣게 익은 씨를 받아 종이봉투에 넣어 서랍에 두었다가 다음 해 적당한 곳에 뿌리면 싹이 나오지만 씨를 받지 않고 그냥 둬도 떨어진 곳에서 새싹이 돋는다, 분꽃의 까만 씨앗은 따 보고 싶게 만든다. 재미로 따서는 아무 데나 던지곤 했다.


전에 살던 동네, 어느 집 담장 바깥으로 분꽃이 화사했다.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보며 지났다.  어느 아침, 남편을 배웅하며 아내가 큰 나무대문 앞에 서 있다. 에프런을 두른 아내는 잘 다녀오라 하고, 갔다 오마고 걸어가던 남편이 문득 되돌아서 왔다. 서 있던 아내에게 주머니에서 뭔가를 한 장 꺼내 주었다.  십만 원짜리 수표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 있어요.” 마흔은 되었을 듯한 아내가 말했다.

“더 써.” 중키에 살짝 마른 듯한 남편은 수표를 쥐여주고는 총총 걸어갔다. 아내는 잠깐 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뭐랄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다.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던 이십 대였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지금도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도 출근을 하는 길이었고 그저 어느 부부의 아침 시간과 마주친 것이다. 

담장 아래 자주색과 노란색 분꽃이 피어 있었다. 밤을 지새운 분꽃은 아직 시들지 않고 초롱초롱했다.

분꽃을 보면 고향 사람을 만난듯하고 그 아침 풍경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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