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러분은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달에 올라갔는지 물어보겠지요. 우리는 큰 수저와 양동이를 들고 우유를 뜨러 갔더랬소. 달 우유는 리코타 치즈처럼 아주 진했거든!*
이탈로 칼비노는 달이 진하고 크리미 한 우유덩어리라고 했지만 일반적인 정설은 완성된 치즈에 가깝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말이다. 계수나무와 토끼, 항아의 고적한 궁전, 너무 시려서 토해낼 수밖에 없던 은으로 된 얼음덩어리..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의 문제일 뿐 달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달 그 자신도 매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변하지 않나. 일부 음모론자들이 여전히 암스트롱을 의심하는 것은 토끼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누가 달에 살고 있을까? 는 오랜 호기심 중 하나였다. 얼룩 같은 달의 음영들은 암스트롱의 첫 발자국 이후로도 이런저런 의미로 곱씹어졌다. 토끼로, 생명의 나무나 손자국으로 여겨진 모양들은 각자의 사연을 담고 진화한다.**
서양권의 ‘달 사나이 Man in the Moon’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달 사나이는 노릿지 Norridge에 가기 위해 서두른다. 길을 묻다 맛본 차가운 프람죽 Cold Plum Porridge에 놀란 달 사나이는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 구식 맞춤법인 프람 죽은 플럼 포리지, 정확히는 서구권 크리스마스 푸딩의 원형이 되는 건포도죽 프루멘티 Frumenty이다. 완두콩, 오트밀로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곤두박질 친 달 사나이의 사연은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었다. 개인적으로 달 사나이와 톰 팃 토트를 섞어 재해석 한 <은빛 황새>를 추천하고 싶다.
#은빛 황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술 https://brunch.co.kr/@flatb201/94
그러나 좀 더 관성적인 정설은 ‘초록색 치즈로 된 달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이다. 우화가 특히 유행한 17세기에 정리된 구전 민화이다. 여우의 꼬임에 빠진 늑대는 우물 안에서 둥실 대는 커다란 공 같은 치즈를 욕심 내다 꺼꾸러진다. 초록색은 컬러가 아닌 치즈의 숙성 상태를 의미한다.
2002년 나사 NASA는 늑대가 착각한 것이 아님을 지지했다. 개선된 허블 우주망원경 테스트를 통해 달이 녹색 치즈로 만들어졌음을 인증하는 사진을 게시했다. 나사의 공식 인증에도 논란은 이어졌는데 달치즈에 표기된 날짜가 유통기한과 판매기한 중 어느 쪽의 만료일인가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인증은 나사의 만우절 농담이었고 첨부된 이미지는 달 탐사선 레인저 9의 자료사진으로 당연히 치즈가 아니다. 너무 즐겁고 귀여운 거짓말 아닌가!
#NASA의 만우절 탐험들 https://asterisk.apod.com/viewtopic.php?t=28172
아드만 스튜디오의 클레이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은 달치즈에 관한 낭만적인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준다. 평소처럼 뜨거운 차에 치즈 크래커를 곁들이려던 ‘월레스’는 치즈가 똑 떨어졌음을 깨닫는다. 마침 휴가지를 고심 중이던 월레스는 파트너 ‘그로밋’과 달치즈를 수확해오기로 한다. 로켓을 타고 달에 도착한 둘은 신선하고 크리미 한 치즈를 맛본다. 달을 거닐다 자판기처럼 생긴 기계를 발견해 동전을 넣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고장 난 줄 알았던 자판기는 사실 달치즈를 관리하는 조리기 Cooker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뒤늦게 작동된 조리기는 집요하게 방문자들을 쫓아다닌다. 허둥지둥 귀가하게 된 월레스와 그로밋은 뜻하지 않게 조리기를 위한 작은 즐거움을 남긴다.
<화려한 외출>이 특히 사랑받는 이유는 낙관적인 휴일의 분위기가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의 소동에도 모두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물 받는다.
크리미해 보이는 달치즈를 기대껏 베어 문 월레스는 애매하다는 듯 우물거린다. 즐겨 먹던 브랜드에 비해 다소 심심했던 걸까? <월레스와 그로밋> 세계관의 달치즈는 달 분화구처럼 구멍이 뿅뿅 뚫린 예멘탈이 아니다. 치즈 미식가 월레스가 사랑하는 브랜드는 ‘요크셔 웬즐리데일 Yorkshire Wensleydale’이다. 당시 CP가 이 치즈를 택한 이유는 발음이 예쁜데다 애니메이션 립싱크에 잘 붙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낙농업 강국 영국 내에서도 요크셔는 유가공 명산지 중 하나로 부드럽지만 부서지기 쉬운 제형의 웬즐리데일은 전통방식을 기준으로 제조되는 주력 모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인플레와 치열한 업종 경쟁으로 인해 웬즐리데일 자회사는 경영난에 빠진다. 우연히 성사된 스튜디오 협업은 클레이메이션의 성공과 더불어 판매지수가 동반 상승하는 행운을 선사한다. 행복한 이야기에 어울리는 행복한 결말이다.
마케팅 사에서 고전으로 언급되는 토마스 립톤 Thomas Lipton의 연대기는 일화마다 유쾌하다.
어릴 때부터 수완 좋고 아이디어 넘쳤던 그는 부모의 가게를 거들다 판매하는 달걀이 커 보이도록 아버지 보다 손이 작은 어머니가 달걀을 팔도록 제안한다.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매장에도 여러 이벤트 동원하며 떠들썩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눈부신 노란색 태그가 달린 ‘주머니 티백 Double Chamber Teabag’ 같은 아이디어 개발은 물론 돼지 입양과 코끼리 퍼레이드 등 홍보와 마케팅 감각도 탁월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일화는 역시 토마스 립톤의 크리스마스 치즈 이벤트다.
1881년 12월, 새로 오픈한 립톤의 매장 주변은 수백 명의 구경꾼으로 붐볐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특별 제작된 자이언트 치즈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JUMBO’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거대 치즈가 특별한 것은 둘레만 4M에 이르는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푸딩 속 참 Charm처럼 치즈 안에는 금화가 무작위로 들어있었다.
립톤의 매장들은 비교적 영세한 동네부터 오픈했는데 그의 시그니처 더블 티백이 ‘가성비’로 폭풍을 일으켰듯 당시 고가의 브랜드와 차별화를 두기 위함이었다. 크리스마스 치즈 이벤트 또한 시즌 스피릿과 구매자의 기호를 결합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 쇼맨십도 뛰어났던 립톤은 눈부시게 하얀 양복을 쫙 빼 입고 나타나 치즈 절단식을 진행한다. 이 럭키 드로우는 판매 2시간 만에 종료된다. 윌리 웡카의 골든 티켓보다도 확실한 황금의 행운을 얻으려 구매자들이 몰린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이런 방식의 럭키 드로우는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립톤은 재빨리 다시 광고를 낸다. 치즈 구매로 얻은 황금을 반환하면 치즈 가격을 환불해 주겠다고. 당연히 환불한 구매자는 없었지만 립톤은 법적으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정말 밉지 않은 뻔뻔함이다.
이후 크리스마스 치즈 프로모션은 영국의 모든 립톤 매장에서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명절과 행운에 대한 기대를 품고 줄 지어 치즈를 포장하는 술렁임을 상상해보면 12월이 아니어도 괜스레 흥겹다.
#크리스티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https://brunch.co.kr/@flatb201/253
토마스 립톤이 보름달처럼 거대하고 둥그런 치즈 속에 숨겨둔 금화들은 제임스 서버가 상상한 유쾌함과 닮았다. 새끼손톱처럼 자라나는 ‘수 많은 달’ 조각, 우리는 저마다의 달을 가지고 있다.
무수한 치즈설에도 어린 시절의 나는 ‘금화 같은 달’을 지지했다. 동화책마다 종종 등장하는 ‘거대한 플로린 금화 florin Gold 같은 달’이라는 수사가 형태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탐내게 했다. 성인이 된 후 언젠가의 전시회에서 보게 된 플로린 금화는 어린 시절의 기대를 완결시켰다. 치즈 한 조각도 귀했을 시대의 어떤 어린이라면 이 금화 한 닢은 충분히 거대하고 소중한 자신만의 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제임스 서버, 수 많은 달님 https://brunch.co.kr/@flatb201/90
달 착륙은 세계사적 충격이었고 배반당한 공상들은 새로운 상상으로 파생된다. Moon Money는 아폴로 11호가 연 본격적인 우주 시대에서 파생된 유행이다.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요즘 포켓몬이나 포토 카드를 모으는 것처럼 당시의 코믹 스트립에서 파생된 아이템으로 추정한다. 마트의 매대나 검볼 머신에서 판매된 흔한 공산품 유행이어선지 특별한 기념품으로 안착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러나 몇몇의 수집가들을 시작으로 중고 시장이 형성되며 존재가 드러났다. 나사처럼 이 마니아들도 달의 금속성이 아닌 그린 치즈설을 지지한다. 구리로 만들어진 ‘그린 치즈 페니 Green Cheese Penny’는 당대의 아이돌 아폴로 우주선과 달을 뛰어넘는 소가 새겨져 있다. 선망의 세계를 뛰어넘는 소. 확대 해석이겠지만 메리 포핀스 에피소드였던 ‘춤추는 소’의 간절한 소망이 겹쳐 보인다.
#메리 포핀스, 어제의 소망도 빛나길 https://brunch.co.kr/@flatb201/91
아래 링크에서 좀 더 자세한 Moon Money의 가이드를 확인할 수 있다
#Moon Money http://www.spaceflownartifacts.com/flown_moon_money_tokens.html
2022년 마지막 주 대한민국, 개인사와 무관하게 총체적으로 엉장진창인 해라고 생각한다. 매년 이맘때면 품는 신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마저 집어삼켰기에 올해의 순간들을 혐오한다. 심지어 올해를 이렇게 만든-멍청하거나 못 돼 처먹은 이들은 한결같이 당당하다. 그토록 선명한 악의가 못생기기까지 해서 외면이 잘 안 된다.
산타여, 문 밖에 그 사람을 데려다주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세상은 이토록 엉망진창이지만 좋은 사람들이 좀 더 머물러줬으면, 찰그랑 찰그랑 소리마저 경쾌한 금화 같은 행운은 보호받아야 할 이들에게 돌아갔으면,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나는 치즈와 젤리를 듬뿍 얹은 크래커를 먹으며 작심삼일의 계획이나 세우는, 대안 없는 분노 대신 그런 게으른 즐거움을 돌려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및 인용/
*달과의 거리, 이탈로 칼비노 Cosmicomics; Distance of the Moon, Italo Calvino
**Can You Spot The Man In The Moon?, National Geographic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culture/article/140412-moon-faces-brain-culture-space-neurology
***Mother Goose; The man in the moon
Wensleydale Creamery Official https://www.wensleydale.co.uk
커버 이미지: Painting the Moon, 일러스트 Adrienne Adams,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