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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10. 2019

8일: '일상'과 '비일상'의 사이

어느새 8월의 시작

일상의 시작

폭풍과도 같았던 7월이 가고 어느새 8월의 시작이다. 마닐라에 온 지 어영부영 일주일이 지나니 그런대로 안정감을 찾은 것 같다. 어린아이와 단 둘이 타국에 머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긴장감을 늦추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하루 단위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마닐라에서의 일상이 시작된 것 같다.


주기에 따른 생체리듬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징후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피부 트러블이 생기거나 평소보다 음식을 많이 먹거나 두통약을 좀처럼 끊을 수 없는 것처럼 모두 제각각이다. 나의 경우는 리듬의 전환 주기가 오면 어김없이 항공권 검색을 한다. 성인이 된 후로 지금까지 유지해온 습관이자 의식이다. 여행을 위한 항공권 검색은 시간과 금전의 여유를 전제로 하는 것일 텐데, 나의 경우는 보통 시간과 금전적 상황 관계없이 '그때'가 오면 예고 없이 시작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전략과 기술을 체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최저가의 항공권을 구하는 법, 가성비를 고려해서 멋진 여행 일정을 세우는 법, 욕심내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서 짧지만 밀도 있는 경험을 얻는 법... 등 실로 구구절절 잡다하다.


나에게 여행은 맛있는 음식들과의 특별한 만남이고, 그 자리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가장 싸고 가장 맛있는 여행의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물론 비공식적으로) 통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오랜 세월 갈고닦은 나만의 노하우와 실력을 발휘하여 지인들 몇몇을 내 마음대로 묶어서 나만의 사적인 단체 여행단을 꾸려 (통상적 여행이라기보다는) 맛 기행을 훌쩍 떠나기도 했다. 향기로운 음식과 좋은 사람들의 조합이야말로 삶을 의미 충만하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 믿기에 당분간은 내 방식의 여행을 계속 즐길 듯싶다.


일상과 비일상의 줄다리기

휴가철의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공항, 호텔, 이국적인 음식, 바다, 사막 등 비일상적 장면들이 넘쳐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휴가길에 오르지 못한 이들에게 가벼운 상실감을 주기도 하는 누군가의 특별한 장면들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난 것이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러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의 가공적이고도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내가 지금 계획하는 여행의 일정에 따라 포스트잇을 붙여 나가는 것처럼 이리저리 머릿속에 나열해 본다. 그렇게 여행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해보고 그것을 지침으로 삼아 모험이라고 믿는 그 길을 떠난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그때) 내 스무 살 시절의 1990년대는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지도 않았고 여행정보 또한 매우 귀했는데,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번역본이 없었기에) 영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을 구해다가 더듬더듬 읽어나가며 여행을 서사적으로 상상하고 길을 떠났었다. 무엇이 더 좋다, 낭만적이다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점차 여행은 상상의 영역에서 시각 구성과 편집의 문제로 옮겨왔다는 사실이다.

 

여행은 우리의 삶에 찐득하게 눌어붙어있는 일상을 잠시나마 떼어내 준다. 아무 생각 없이 수행했던 반복적인 일과들이 일시에 멈추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채워 넣을 수 있는 'DIY 시간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내 손에 잠시 동안 주어진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소중한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타국의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비일상적 상황에 내던져지는 것이 마냥 즐겁고 신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공항에서 숙소까지의 첫 발을 내딛는 여정부터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여행기간 중 베이스캠프가 되어주는 나의 소중한 숙소는 낯설고 불편한 세계에  떨어진 내가 충분히 통제하고 예측하고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 8인 도미토리의 침대 한 칸이든,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든 간에 여행자에게 베이스캠프가 지닌 의미는 매우 크다.


그레이스 레지던스, 나의 고마운 베이스캠프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이 작은 공간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일상의 규칙이 생겼다. 느지막이 아침 8시에 일어나 아이의 아침을 준비하고, 9시에 함께 아침식사를 한 뒤 11시부터 영어수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에 점심을 먹고 3시쯤 영어 과외 교사가 돌아가고 난 뒤에 아이와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즐기다가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아이는 그때부터 약간의 과제(기초 연산 풀이와 영어 숙제)를 하고 유튜브를 보다가 씻고 잠든다. 아이가 잠든 후 겨우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매일매일 조금씩 다른 무엇인가를 하다가 늘 자정을 훌쩍 넘긴다. 잠결에 끊임없이 안겨오는 아이를 적당히 떼어내거나 감싸 안으며 그렇게 깊지도 얕지도 않은 잠을 자다가 아침을 맞이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마닐라의 복잡한 풍경과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이다. 일상과 비일상은 그렇게 구별되기도 하고 때로는 섞이면서 나름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이제 비로소 나는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 기분이 든다.


소박한 아이의 아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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