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Aug 11. 2019

10일: 비 내리는 마닐라

DAY OFF

뒹굴뒹굴

여전히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다. 침실은 암막 커튼까지 달려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늘어지게 잠만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날은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그냥 늘어져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냥 딱 하루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고 싶은 지금 내 상태에 맞춤옷처럼 딱 어울리는 날씨다. 마침 오늘은 영어 수업도 없는 날이다.


거실 쪽으로 난 한 쌍의 작고 기다란 창에 기대어 서서 밖을 내다보는 취미가 생겼다. 레지던스와 담을 맞대고 있는 동네는 복작복작한 것이 골목마다 항상 재미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 마리의 동네 개들이 쫒고 쫓기며 놀고 그것을 두 마리의 집고양이가 옆 화단에 새초롬하게 앉아 구경하는 모습이라던지, 옥상에서 식구들의 빨래를 쉼 없이 널고 있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길가 담벼락에 임시로 달아놓은 농구골대 밑에서 신나게 경기를 하는 서너 명의 아이들... 넋을 놓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게 된다.

 

작은 거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오늘도 어김없이 창문에 기대어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남자, 그 옆 좁은 골목에서는 오토바이와 택시가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고, 거리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보니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과 함께 서늘한 기온이 느껴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폭염주의보가 내렸다고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피서를 하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영어수업이 없는 주말이라 아이를 데리고 어디라 가야 할 텐데, 이렇게 비가 내리니 좋은 핑계가 생겼다. 도로 정체가 극심한 마닐라 도심에서 비 오는 주말에 어린아이를 달고 외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아이에게 오늘은 특별히 넷플릭스에서 원하는 애니메이션을 마음껏 봐도 좋다고 선심 쓰듯 말해 두었다. 들고 온 노트북이 하나뿐이라 넷플릭스를 볼 아이에게 밀려 나는 자연스레 침대로 갔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이라도 읽자. 마침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손에 잡혔다.


최선 혹은 차선

아직 앞으로 마닐라에 정확하게 20일을 더 머물러야 한다. 진키에게 실망했다기보다는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이의 영어 교육을 위한 것이다 보니 엄마로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진키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숙녀다.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라는 것은 그 사람이 겪는 나이만큼의 무게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진키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법을 함께 찾아나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나로서는 여기까지 온 이상 모든 선택의 중심에는 아이가 있어야 했다.


다시 영어 과외교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그나마 가까운 필리핀 과외전문 학원을 찾아 문의를 해보니 30시간에 해당하는 수업료를 한 번에 지불해야 첫 수업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선생님들의 수업 일정이 모두 차서 주말이나 평일 오전 8시만 가능하다고 했다. 여러 조건이 우리와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 연락해봤던 다른 과외 교사들 중 연락이 닿은 한 선생님에게 주변의 과외교사를 소개해줄 수 있냐고 물으며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답이 없다. 조건에 맞는 교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막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영어 과외 교사를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여자 주인은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녀의 따뜻한 호의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과외교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울할수록 더 아름다워 보이는 노을


작가의 이전글 9일: 두통에는 브런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