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노 카드
오늘도 집시가 그 먼 길을 걸어왔다.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도 곧 끝날 것이었다. 이번이 19번째 영어 수업이고 앞으로 단 두 번의 영어 수업만을 남겨두었다. 조만간 헤어진다는 사실에 서로가 많이 아쉬웠다. 이별은 어쨌거나 감정이 쓰이는 일이고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러고 보니 출국까지 단 5일만이 남았다. 이번 마닐라에서 맞았던 월요일은 앞으로 몇 번이나 남은 월요일 중의 하루일 뿐이었고, 주말 또한 몇 차례 남은 주말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벼웠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해도 크게 상관없었고,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다섯 손가락으로 셈이 가능하게 된 날부터 갑자기 하루가 무거워졌다. 복잡한 교통과 날씨를 이유로, 혹은 애매하게 잡힌 수업시간을 핑계로 아이와 바깥나들이를 소홀하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여러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데, 몇몇 동네는 아예 가보지도 못했는데... 아쉬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게으른 엄마와 게으른 아들 콤비의 나른한 일상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나이 많은 아빠와 엄마는 아이와 몸을 쓰며 힘껏 잘 놀아주지 않는다. "진심으로 할 것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싶지만, 사실 나와 남편은 나이 먹은 만큼 기력이 쇠하여 30대 엄마 아빠의 에너지를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외동인 아이는 그래서인지 혼자 노는 것에 도통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몇 시간이고 혼자 이리저리 왔다 갔다 머릿속의 이미지를 그리며 잘 논다. 가끔은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지만, 늘 고맙고 다행이다 싶다.
마닐라에서 우리는 24시간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내내 붙어있으면서 함께 먹고, 자고,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놀 때만큼은 각자 방식으로 알아서 놀았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브런치 글을 쓰는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활용했고, 아이는 정해진 시간만큼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고, 영어자막으로 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을 시청했다. 각자 놀아도 함께 있어서 충분히 좋았다.
그마저도 각자 노는 게 시들해졌는지 우리는 어제 다녀온 마켓 마켓에서 사 온 우노(UNO) 카드를 마주 앉아 시험 삼아 한번 해보았다. 세상에!!!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엄마와 아들은 그렇게 바닥에 앉아 수십 번이 넘도록 질리는 줄도 모르게 계속 우노 카드 게임을 했다. (원카드와 비슷한 게임으로 매우 단순하고 쉽다. 먼저 자신의 카드를 모두 내려놓는 사람이 이긴다.) 온종일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깔깔 웃으며 구르기도 하고 이겼다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아깝게 졌다고 발을 구르기도 하면서 정말 아이와 둘이서 잘 놀았다. 아이와 놀고 나서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든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