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2001년 3월 1일도 별 다를 것이 없는 일상같이 시작되었습니다.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Hudson River Pkwy 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이른 오전 출근길도 정상적인 트래픽이었고, West Side Highway 를 타고 Manhattan South 로 오는 길도 한산했습니다. 오전 7시, WTC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87층 사무실에 도착하였습니다. 짙은 브라운색의 reception area 를 지나 비서들과 기타 지원업무를 하는 직원들의 책상이 100여개 들어서 있는 main floor 를 통해 빌딩 남서쪽 코너에 제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방금 청소직원이 깔끔하게 책상을 닦고 정리한 후였는지, 약간의 windex 냄새도 코 끝에 느껴졌습니다. 1층 lobby 외부에 있던 vendor 에서 구매한 raisin bagle 하나와 black coffee 한 잔을 책상위에 두고 4개의 monitor 를 켰습니다. 남서쪽을 향하고 있던 제 사무실은 아직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미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도 여전히 뉴욕의 남쪽 하늘은 항공사 파일럿들이 보통 사용하는 용어인 "Severe Clear" 한 청명하기 그지 없는 맑은 하늘이었습니다. 어떤 승무원들은 Aching sky (너무 맑은 나머지 '아픔' 이 느껴지는 하늘이란 의미) 라고도 하더군요.
한 달 전, 회사에서 새롭게 만든 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단기 임무로, '신흥국 투자관련 업무' 라고 간략하게 정의된 일들 - 저는 한국에 배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 후 아직까지 한 차례도 가 본 적이 없는 한국이었습니다. 떠난 후 20년이 가까이 되었고, 그 사이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일이 없었지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상당히 많은 회사들이 해외자본에 매각이 되던 시절, 제 회사는 그 마지막 단계에 남은 매물들 - 비교적 까다롭고 큰 매물들 - 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의 여행 일정은 4월 1일로 정해진 채, 한국 지사에서의 서류들이 24시간 내내 fax 로 들어오던 날들이었습니다.
Monitor 한 개에는 CNBC, 그리고 또 다른 monitor 들에는 아직은 얼어버린 듯한 ticker screen 이 들어왔습니다. 밤새 들어온 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유일하게 한국어로 제목을 단 이메일이 눈에 띄었습니다:
Date: Thurs, 1 Mar 2001 06:02:04 EST
Subj: 혹시...
Date: 3/1/01 07:27:29 AM Eastern Standard Time
안녕...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메일을 띄운다.
난 6학년때 3반이었고...
중간에 전학하지 않았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궁금하구나..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이메일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국민학교 6학년 때 제 짝, 혜련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