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 째 이야기
(계속) 한국으로의 출장 준비와 더불어 원래 업무까지 더해져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져 정말 오래간만에 느끼게 된 감정의 변화는 가뜩이나 꽃가루 앨러지가 심했던 제 증상마저도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더군요. 일을 하면서 창 넘어로 보이는 매일 보아도 멋진 Manhattan south 의 광경도, 간간히 떠오르는 예전 생각들에 비하면 그리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초반, 전학을 가게 된 그 날은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기억으로는 한 달 정도 여러가지 행사 준비로 인해 모두가 바빴던 것 같습니다. 오후 종례 때 선생님께서 저를 앞에 불러 세우시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라고 했던 기억. 그리고 그저 무덤덤하게 서 있다가 가방을 챙기고 학교 건물을 나서던 길 - 운동회 연습이 절정에 달한 그 때라 방과후도 모두 남아서 운동장에서 카드섹션 비슷한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혜련이는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저는 학교 건물을 나서던 길에 그 애를 보았지요. 혜련이는 연습중이라 그저 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저와 이별을 했습니다. 저도 그 때 기억으로는 그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요.
그 애를 이제 4월이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참 마음이 가벼워지는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그저 예전 국민학교 동창일 뿐이었고, 아무리 첫사랑이라 해도 풋풋한 장난같은 감정이었을 뿐인데, 막연함 기대감과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어떤 모습일까,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그녀의 향기는? 그리고 만약 내가 또는 그 애가 서로에 대해 실망하게 되면 어떻하나 . . . 생각과 상상은 끝이 없이 이어졌고, 이날 이후 이상하게도 저는 퇴근 후 그리 가고 싶지 않았던 32가 Koreatown 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문화는 어떤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노래, 영화, 드라마, 그리고 그 외 요즘 유행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알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민을 간 이후 계속 그 곳의 삶을 살다가 직장을 잡은 후 정말 오래간만에 접한 한국관련 첫 뉴스는 1997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financial crisis 가 발생했을 때 제가 일하던 trading floor 지붕에 걸려 있던 수많은 TV 에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특히 금을 모아서 국가 채무를 탕감하는 데 돕자는 장면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TV 를 바라보던 생각까지.
오랫동안 몰랐던 한국, 그리고 그 곳에서 날아온 이메일, 그리고 혜련 - 모든 것들이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이민을 간 후 한국어를 집에서 사용했고, 나름대로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어야 언어를 기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한국소설, 수필, 그리고 여타 다른 서적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모든 소설들,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 그리고 그 외 가볍고 무거웠던 수필집들과 시집들을 읽었지요 - 이렇게 알고 있던 한국 . . . 이제 한 달 남짓 후엔 그 곳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 또한 20대 후반의 제게는 마치 10대 후반 새로운 경험을 한 아이처럼 깊이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밤, 혜련이는 3장의 이메일을 보냈고, 저는 4장의 답장을 했습니다. 아래 이 편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성실한 내 친구에게 감사하며..
보낸날짜 2001년 03월 07일 수요일, 낮 2시 01분 00초 KST
너무나 멋지고 성실한 너의 삶에 감탄했어. 내 친구라는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처음엔 그저 너의 이름 석자에 가슴 벅찼는데, 널 알아가면 갈수록 그 감정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
이젠 서글프게도 처음에 사람을 만나면, 이미 보이지 않게 성립되어 버린 여러가지 나만의 잣대를 갖고 만나게 된다. 건조하고 형식적으로 말이지.그 사람의 인성이나 인간으로의 매력보다는 무엇을 하는지, 배경은 어떤지,나의 상황에 맞는 사람인지 등등의 외부적인 조건에 더 관심이 많을 때가 있어. 사람보다는, 사랑보다는, 내 자신이 더 중요해져버린 탓이겠지? 그래서 한동안 너무나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았구나 반성도 많이 했어. 물론 어머님의 도움이지만, 하나님을 통해서 아주 소박하게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소중한 마음을 가슴으로 안을 수 있게 됐어.
너를 만나 중요한 건 내게 단 하나...내 오래 전의 삶에서 소중한 추억을 끌어내 아름다운 마음을 맞춰보고 싶은 설레임이야. 삶의 잣대로 재지 않아도 되고, 낯선 남자에게 느껴지는 의심이나 불안도 없어도 되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너의 존재 하나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이것으로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네게 감사하고, 이런 만남을 예정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마도 이런 것들 때문에 (너가 많이 당황스러웠겠지만) 너무 빨리 마음을 열었나봐....아직도 놀래고 있니?
난 사람이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라고 생각해. 참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선택적으로 쌓여질 수 있는 감정인데, 우리는 벌써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이런 소중한 감정의 배면에 한 가지 걱정스러운게 있어. 현실 속에서 재회했을 때 우리의 만남이 조금은 어색하거나 실망스러워지지나 않을지... 물론 친구에게 실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말야. 이렇게 멀리 있는게 보고싶어도 바로 보고 느낄 수 없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어쩜 더 다행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런 소심한 마음은 아마 널 소중히 생각해서 일거야.
정원아! 정말 반갑다.
정말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길 기도할께...
## 내가 좋아하는 것 한 가지 알려주고 싶다.
아직까지 내 인생 최대의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시간있으면
꼭 봐! 이태리 영화인데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란 제목으로 개봉됐어.
또 연락할께.. 잘자....
혜련...............^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