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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n 16. 2016

"뉴욕, 첫 키스 (2)"

지하실 창고에서의 이야기

12월 1일부터 시작된 1988년의 겨울방학은 그 첫날부터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맨해튼이라는 마술 같은 도시, 진정한 뉴요커들과 같이 출퇴근을 한다는 사실, 이에 더불어 제 일상처럼 되어버린 bagle과 coffee, 그리고 고등학생이었지만 꽤 후하게 받게 된 주급, 그리고 Holly라는 멋진 여성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저를 들뜨게 하였지요. 물론 그녀는 26살로 저보다 10살이나 많았지만, 10대 소년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상상은 그 끝을 모르듯이, 저도 마치 그녀가 제게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 뉴욕을 잘 모르는, 아니, 너무 모르는 한국계 미국인 소년을 위한 그녀의 배려와 친절함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다들 그러했듯이 저 또한 어리숙하고 생각이 마냥 어리기만 한, MTV 에 나오는 뮤지션들이 그저 멋지게만 보이고 그들의 노래를 따라 하면 저도 그들처럼 멋져 보일 수 있는 상상으로 가득한 그런 아이였었지요.


당시 Queens 에 위치했던 집에서 오전 7시에 나와서 No. 7 지하철을 타면 대략 45분 후쯤 그 유명한 59가 브릿지 아래 뚫린 터널을 통해 맨해튼에 진입하게 되고, 59가와 Lexington Avenue 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지하철역이 제가 매일같이 드나들던 지하철 역이었습니다. 걸어나오면 여기저기 맨홀에서 뿜어나오는 증기들이 묘한 도시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이는 마치 영화 Batman 의 Gotham City 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지만, 이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 실제 느낌과는 매우 다르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Bruce Willis 의 주연작이었던 Die Hard 1 이 그 당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멋진 모습이었던 그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지하철 플랫폼 여기저기에서 보면서 마치 제가 고등학생이 아닌 20대 초반쯤 된 그 "평범한 뉴요커"처럼 느껴졌었지요. 물론 이 또한 10대 소년의 끝이 없는 상상의 한 갈래였었습니다.


Holly와 저는 출근시간이었던 8시 30분부터 (Holly는 10시에 출근을 했었습니다) 갤러리 매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고, 지하실에 있던 창고에서 그림 정리 및 관리를 하루에 두 차례씩 했습니다. 오전에 습도 및 온도 조절, 그리고 같은 작업을 퇴근시간인 8시경에 또 한번 하곤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열흘도 남지 않은 어느 날 오후부터는 "크리스마스 열흘 전부터는 손님들이 많이 오니까 준비를 해야 한다"라는 큰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지하실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크고 작은 유화들과 프린트들을 frame 에 넣고 먼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벌써 20년간 그곳에서 갤러리를 하시던 큰아버지의 말씀대로 다음날부터는 그렇게도 한산하던 갤러리가 하루에 100명이 넘는 손님들이 드나들 정도로 바빠졌습니다. 그곳에 있던 그림들은 대부분 중견 미술가들의 그림들로, 맨해튼 동쪽 부촌, 즉 센트럴 파크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에 위치한 65가부터 90가까지의 거주지를 의미하는 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찾았습니다. 열 블럭도 되지 않는 곳에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런 미술관이 가까이 있어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접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은 이곳 사람들이었지만, 중견 미술가 또는 신인 미술가들의 작품 또한 매우 즐기고 구매 또한 상당히 많이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지요. 그저 Manet 나 Monet 아니면 Picasso 의 프린트를 벽에 걸고 그저 미술이라고 생각하던 제 생각이 너무나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경험이기도 합니다.


12월 20일이었으리라 기억됩니다. 늦게까지 창고 정리를 Holly와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지은 지 30년도 넘어가는 건물이라 창고 작업을 할 때마다 바로 옆 Lexington Avenue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지하철 4, 5, 6번의 소리와 진동이 꽤 가까이 느껴지곤 했었습니다. 그날 밤도 그랬었고, Holly와 제가 잠시 쉬고자 창고 안에 있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을 때도 그 진동이 꽤나 강하게 느껴졌었는데, Holly 가 갑자기 제 손을 꼭 잡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놀랄 겨를도 없었던 저는 그저 그녀의 눈동자를 - 그 아름답던 갈색 눈동자를 - 바라만 보고 숨 쉬는 것마저도 참고 있었지요. 몇 초가 지났을까.... 그녀가 하하! 하고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I didn't mean to startle you, but apparently you seems quite frightened. I am so sorry."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런데 너 꽤나 놀라보인다. 미안해.")


"No, no... it's just that.... you held my hand, so... " (아녀요, 그냥, 그게, 손을 잡길래, 그래서...)


"Alright. Now, I want you to try this with me. come." (알았어. 자, 나하고 이거 해보자. 이리 따라와)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저를 창고의 네 벽들 중 유일하게 비어있는 한 벽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물론 제 손은 그녀의 손에 잡힌 채였고, 그녀의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느낌은... 차가왔습니다. "손이 매우 차네..."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손이 차가운 여자는 마음이 착하지는 않다던데, 백인 여자들에게도 그럴까?"라는 엉뚱한 생각 또한 떠오르더군요.


갤러리 창고는 그저 평범한 창고는 아니었습니다. 그림들을 온전히 보관하기 위해 상당히 비싼 기기들과 장치들이 온도와 습도, 그리고 냄새까지 완벽하게 조절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냄새는... 뭐랄까... 바삭바삭하게 습기가 많이 제거된 종이의 기분 좋은 향기라고 해야 가장 적절할 듯 합니다. 벽은 나무 재질로 되어 있었고, Holly 가 저를 이끈 벽 또한 옅은 oak 색의 나무판들로 되어 있었지요. 나무의 독특한 향과 특수 처리한 약품의 깔끔한 냄새, 그리고 여러 종이들의 향이 더해져서 아주 exotic 한 aroma 가 콧속 가득히 채워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Holly는 저를 그 벽에 이끈 후 저를 마주 보고 섰습니다. 그 후 이렇게 말하더군요:


"Now, place your right ear on the surface of the wall." (자, 귀를 벽에 대고 서 봐봐)


"Alright. I got it." (네, 알았어요)


"Now, and when I say 'closer', place your ear and your hands really tight and close to the wall. OK?" (자, 그리고 내가 가까이 라고 하면 귀와 손을 벽에 가까이 붙여봐봐. 알았지?)


저는 고개를 끄덕거린 후 약간은 엉성한 자세로, 오른쪽 귀는 벽에 가까이하고 두 손은 벽에 어느 정도 가까이 대고 서 있었습니다. 그녀 또한 거의 같은 자세로 서 있었지요. 잠시 후 지하철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Now, try - put your ear and your hands really tight and close to the wall." (자, 귀와 손을 아주 가까이 벽에 대)


잠시 후 지하철의 소리와 진동이 강하게 벽에 전달되어 왔습니다. 객차의 바퀴들이 선로를 지나는 소리가 일정한 패턴을 가지며 소리와 진동으로 전달되었는데, 그저 다른 지하철 소리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러한 소리와 진동이 마치 어느 다른 공간을 통해 전달되어 확장되어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메아리같이, 전철이 지나가는 터널과 Holly와 제가 있던 그 지하실 사이 어딘가에 또 다른 빈 공간이 있는듯한 느낌이었지요.


같은 자세로 같은 소리와 진동을 느끼며 이런 제 모습을 마주 보던 Holly 가 아마도 제 표정을 읽었는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I think you know exactly what I felt from the sound and vibration. I can see it in your face." (얼굴 표정을 보니 내가 느낀 걸 너도 느낀거 같다. 맞지?)


"I suppose so. So, what's out there?" (그런거 같아요. 근데 뭐여요?)


"What do you mean?" (무슨 말이니?)


"Sounds like there is an echo passing through right between the subway tunnel and this place." (지하철하고 여기하고 사이에 메아리가 느껴지는 듯 해요)


그녀는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지금의 지하철 시스템이 사용되기 전에, 도시계획의 실수로 인해 잘못 건설된 터널이 맨해튼 여러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59가 지하철역에서도 이 비밀의 터널에 들어갈 수 있는 문들이 몇 개 있는데, 도시에서 관리는 계속하고 있지만 객차가 지나갈 수는 없는 구조라더군요. 그리고 6번 지하철을 타고 59가에서 80가 전철역까지 가는 터널길을 자세히 보면 이 비밀의 터널을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신비로운 맨해튼이었지만, 이 이야기로 인해 더 이 도시에 매료되게 되었지요.


그렇게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와 저는 5번 정도는 더 지나가는 기차소리를 들었고,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웃으며 30분 정도를 그저 흘려보냈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은 깊어만 갔고, 밀린 일을 마치고 나온 시간은 밤 10시... Lexington Avenue 에도 한가해졌고, 아침에도 보았던 맨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들은 밤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더 하얗게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늦은 시간이라 Holly는 제게 taxi를 잡아 주었고, 저는 그녀가 잡아 준 taxi 에 탄 후 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던 기억... yellow cab 뒷창문으로 보던 Holly 의 모습... 빨간색 반코트를 입고 제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어주던 얼굴은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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