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향기, 그리고 그녀의 감촉
12월 20일부터 12월 24일까지는 바쁘다는 표현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쉴 틈이 없었습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그 당시엔 미술품에 대해 설명을 하는 데 있어 언어적인 능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 사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 분야에 대한 언어의 사용을 잘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요 - 저는 주로 창고에서의 업무, 포장, 계산 및 배달 일을 맡았습니다. 큰아버지의 경우 연세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하셨고 그리고 졸업 또한 수석으로 졸업하신 분이라, 구사하셨던 영어는 상당한 수준의 고급영어 (한국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만, '상류사회의 영어'라고 해야 더 적절할 듯 합니다) 로 기억됩니다. 큰아버지의 영어를 접했다는 것 또한 제겐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Holly 가 고객을 위해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구사하는 영어란 지금까지도 자주 접하지 못하는 수준의 표현력으로 기억됩니다. 미술작품을 설명할 때 Curator 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절제되어 헤프지 않지만 동시에 매우 세부적인 표현" 이라고 하는데, Holly 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 완전함 자체였습니다. 제가 차후 미술 전공을 하고 많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지만, Holly 의 curating 또한 이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지요. 이렇게 멋진 여성을 저는 갤러리 한 쪽에 서서 한없이 바라보며, 그저 매료되었었습니다. 가끔은 고객에게 웃어주기도 하며, 대화 중 크고 작은 제스쳐로 반응을 하고, 작품이 포장되어 고객의 손에 들려 나갈 때엔 마치 잘 키운 꽃송이 하나를 보내는 듯한 깊은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고객들이 Holly 의 표정을 보고, 그들이 구매한 작품이 참 좋은 작품이었구나 - 라는 마음을 아마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12월 25일은 휴일이었고, 그 이후 12월 31일까지는 이상하리만큼 하나도 바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그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 트렌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들이 남았고, Holly 는 큰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저와 같이 점심식사 후엔 2시간 정도 Lexington Avenue 를 남북으로 걸어다니며 왕복하며, 이름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가게들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였고, 이렇게 같이 한 5일여간의 기간동안 Holly 는 제게 미국이란 곳, 특히 뉴욕이란 곳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뉴욕 그 부촌에서 태어나 계속 맨해튼에서 학교를 다니고 성인이 된 그녀가 알려준 뉴욕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그 어느 책에서도 또는 다큐멘터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되었습니다.
12월 31일은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New Year's Eve 라, 갤러리도 오후 4시에 닫기로 한 날... 그 날은 제가 갤러리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1월부터는 학교 준비를 해야 했기에, 점심에는 간단한 party 까지 했었지요.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한 달이라 그만둔다는 사실 또한 그렇게 아쉬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고, 갤러리는 제가 아무때나 찾아 올 수 있는 곳이었고 Holly 도 이곳에 계속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겠지요. 눈이 점점 많이 내리고 있는 오후, 큰아버지는 가게 앞에 쌓인 눈 정리를 하고 계셨고, 저와 Holly 는 counter 옆에서 배송할 작품 하나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Holly 가 지하실로 내려가더니, 작은 paperbag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제게 Holly 는 그 가방을 건네주며, "I prepared this for you (너를 위해 준비했어)" 라며 웃었습니다. 열어 보니 그 안에는 "Simon and Garfunkel's Greatest Hits" 라고 쓰여진 cassette tape 하나가 예쁜 포장에 싸여 있었습니다.
"People in New York don't give expensive gifts to each other, but we put our hearts in them."
"Thank you so much! I always wanted to try their songs, especially 'The Boxer'."
"Try 'Kathy's Song'... that's my favorite one."
그 노래의 가사는 참 아름다왔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참 슬픈...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돌이켜보면, 어쩌면 Holly 의 운명같은 일들을 암시하는듯한 가사가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I hear the drizzle of the rain
Like a memory it falls
Soft and warm continuing
Tapping on my roof and walls.
And from the shelter of my mind
Through the window of my eyes
I gaze beyond the rain-drenched streets
To England where my heart lies.
My mind's distracted and diffused
My thoughts are many miles away
They lie with you when you're asleep
And kiss you when you start your day.
And as a song I was writing is left undone
I don't know why I spend my time
Writing songs I can't believe
With words that tear and strain to rhyme.
And so you see I have come to doubt
All that I once held as true
I stand alone without beliefs
The only truth I know is you.
And as I watch the drops of rain
Weave their weary paths and die
I know that I am like the rain
There but for the grace of you go I.
그녀는 직접 그 tape 을 제가 당시 가지고 다녔던 Walkman 에 넣고, "Kathy's Song"을 fast forward 하여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선율이었습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Holly 는 옆에서 같이 따라 불러주었고, 얼마나 잘 아는 노래였는지, 그녀는 음 하나 가사 하나 틀리지 않게 그 노래를 참 고운 목소리로 불러 주었습니다.
노래가 끝난 후 Holly 는 제게 다가왔습니다... 두 손으로, 그 차가운 두 손으로 제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제게 "Happy New Year" 라고 하며, 제 오른쪽 뺨에 키스를 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향, 그녀의 감촉, 그리고 숨결을 단 몇 초만에 모두 느낀 그 때의 기분은 지금도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꿈결같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그 키스에 대한 답을 했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놀람과 황홀함에 서서 Holly 를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저를 보고 크게 웃으며 제 뺨을 한 번 더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포장된 미술작품을 서운하게 떠나보낸 그 눈길을 제게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