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읽은 한 책에서, 이 세상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정신적 과잉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일명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전 세계인의 15%를 차지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얼핏 들으면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하며 살지 않나?’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건 정확히 내 얘기야!’하고 전율이 돋았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생각을 주체 못 하는 괴로움에 철저히 시달렸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실에서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려 달라고 했다 치자. 친구가 팔을 뻗는 대신 가볍게 지우개를 내 쪽으로 던져주기라도 하면, 나는 ‘그 친구가 내게 기분이 상한 것이 있나’부터 시작해 최근에 그와 한 대화를 모조리 떠올리고 서운했을 지점을 탐색한다. 그리고 내게 지우개를 던져주며 웃고 있는 친구들과 더 친해진 것이 아닐까 하며 그들의 관계를 추적해본다. 이것은 친구가 던진 지우개가 내 책상에 안착해 내가 그걸 주워 드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릴 때는 내가 아주 소심한 아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보니, 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
생각은 정말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나를 괴롭게 했다. 자기 전 괜한 불안과 걱정으로 밤잠을 지새우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숨을 쉬는 템포보다도 빠르게 내 머릿속 목소리는 다양한 주제를 떠들어댔다. 한 여름밤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누우면, 선풍기의 연식부터, 타이머가 따닥따닥 돌아가는 소리로 말미암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심지어는 선풍기가 없는 세상에서의 여름까지 떠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5년 전에 떠난 여행지에서 먹었던 크레페가 떠오르고, 그때 돌아오던 비행기 내부의 모습이 이어서 생각난다. 즉, 개연성도 없으며 쉼도 없었다.
때문에 내가 잠들기 위해서 찾아낸 방법은 새하얀 공간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새하얀 공간‘만’을 생각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이 방은 금세 다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와 엉망이 되고는 했다.
이런 나의 뇌는 나를 산만하고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긴 했지만, 나는 이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는 못한 채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내가 삶에서 힘든 순간을 맞이하자 날카로운 파편들이 되어 나를 찔러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 부정적 사고로 물든 생각들은 쉽게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매일 최악의 생각만을 곱씹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연히 길에서 지나치는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할 거라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갔다. 나는 길거리의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바로 그런 때에 저 책을 읽은 것이었다. 책을 통해서 나는 이토록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타고난 것이고, 그냥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곧이어 든 생각은 이러다 생각이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멈출 방법이 간절해졌다. 이게 그냥 ‘나’라면, 나는 나를 컨트롤할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그것을 직면하기부터라고 했던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고 나자, 나는 몇 년 동안 나름 몇 가지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이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소설가가 꿈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기에 꾼 꿈이었지만, 덕분에 몇 년에 한 번씩 꾸준히 습작을 썼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살면서 해본 적 없던 집중력을 발휘했었다. 그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갔겠다 싶었을 만큼, 나는 쓰고 싶은 글에 한 번 꽂히면 밤을 새워서 써내곤 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내가 어릴 적 썼던 습작들은 정작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습작들은 대개가 가족 이야기였다. 주로 그 시절 나의 고민과 생각들을 글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글을 써내기 위해선 그에 관한 생각들을 최대한으로 해야 했다. 덕분에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글이 마무리된 뒤에는 더 이상 같은 고민으로 골치를 썩지 않았다. 써낸 글 속에 그 주제에 관한 내 모든 생각들을 봉인해버린 기분이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나에게 아주 좋은 방법이 되어준 셈이다. 생각을 다루는 방법 말이다.
어릴 적 기억에서 발견한 글쓰기처럼 다른 방법들 또한 우연한 기회에 발견했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조깅이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운동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대 내내 내가 주로 했던 운동의 목적은 다이어트였다. 내 몸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운동은 내게 있어 그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자연스럽게 변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운동은 내 아픈 허리 통증을 위한 필요성으로서만 내게 남았다. 다만 내가 했던 운동 중에 ‘좋아서’ 다시 생각난 것이 조깅이었다. 너무 힘들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달리는 상태는 내게 ‘고르게 숨쉬기’와 ‘다리를 움직이는 것’ 이외의 생각들을 모두 말살시켰다. 그리고 운동 뒤의 쾌감은 생각을 멈추고 휴식을 취한 뇌를 한층 더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운동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자기 관리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말하는 ‘자기 관리’의 의미에 편견을 좀 가지고 있다. 운동으로 말미암은 ‘자기 관리’는 비단 몸매나 건강만이 아니다. 설령 그것들을 목적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사실과 운동 뒤의 성취감 등이 주는 만족은 정신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케어해주는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깅보다 더욱 우연히 발견한 방법은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예체능과는 전혀 관련 없는 전공과 진로를 선택해왔지만, 정작 나를 돌보는 방법들이 내가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라는 점이 참 재미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림이 그런 식으로 내 인생에 들어왔다.
가끔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사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림에 대해 배워본 적도, 내가 해 볼 것이라고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마음의 치료에 그림 그리기가 하나의 방법으로 쓰인다는 것은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길을 걷다 우연히 눈에 띈 문구점에 들러 다짜고짜 ‘그림이나 그려볼까?’하고 드로잉 북과 색연필을 사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아주 허접했다. ‘역시나’하고 스케치북은 바로 구석행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문득 한쪽 구석에 꽂힌 스케치북 모서리를 보고는 ‘물감으로 그려볼까?’하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마음이 나아지기 위해서 무엇이든 시도해보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나가 수채화물감을 사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냥 좋아하던 고양이 사진 하나를 골라 그려보기 시작했다.
이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림이 대성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확히는 ‘그림 그리기’가 내게 아주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의미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달릴 때처럼 숨이 가쁘지도 않았고, 글 쓸 때처럼 특정 주제에 몰두하지 않아도 나는 아주 완벽하게 생각하기를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뇌가 쉬고 나면 더 이상 이전의 감정과 생각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수 시간의 붓칠은 그렇게 나를 치료했다.
가장 최근 그린 고양이, "뽀양이"(from 뽀양TV)
영화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에서 “사람은 힘들 때 돌아가 쉴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숲’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그 영화를 보고 나의 작은 숲은 어디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비단 장소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꾸밈없이 가장 나답게 해주는 가족의 품이 그럴 것이고, 아프지 않게 나를 마주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나만의 ‘작은 숲’이 되어줄 것이다.
설령 만족스럽지 않은 내 모습이라 할지라도 ‘나’로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런 내 모습과 더불어 살아갈 길이 생기는 듯하다. 여전히 나는 생각이 많고, 가끔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도 있지만, 나는 나만의 방법과 루틴을 찾아 나와 친해졌다. 그리고 그 방법들은 혹시 내가 다시 넘어지더라도 나를 다독이며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줄 나만의 ‘작은 숲’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조금씩 나의 일상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