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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Jul 13. 2022

5. 직장은 학교다

업무 지시를 제대로 하던지, 질문을 예쁘게 받아주던지

나는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았다. 선생님들은 내가 꽤나 귀찮았을 거다. 교과 과정에 필요한 게 아니면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들일 텐데 나는 내 호기심을 충족하느라 선생님들을 괴롭힌 적이 많았다.


질문을 적당히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청소년기를 맞으면 서다. 내 질문으로 인해 수업시간이 늘어지면 내게 눈치를 주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위축이 됐다. 모르면 배워야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고 했지만 단체 생활에서 '질문'은 구성원들에게 똑같이 할당된 수업 시간에서 내 몫을 더 가져가는 것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일단 대학에 와서는 학구열이 많이 죽었다. 수업이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으니까 질문할 것도 없었다. 갑자기 학구열이 생겨서 교수님한테 질문을 할 때는 손을 드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댔다. 교수님이 '왜 이런 걸 묻지, 천한 것?' 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아서 궁금한 걸 그냥 많이 참기도 했다. 외려, 질문하는 사람을 눈치 주는 쪽은 내가 됐던 것 같다.


직장에서의 질문은 더 어렵다. 나는 돈을 받고 일하니까 업무를 잘 해내야 하는데 사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입사하고 제대로 된 업무 교육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없이 업무를 턱턱 받으니까 머리가 멍해진다. 우리 팀에서 일이 주어지는 걸 비유하자면 이렇다.



상사 : "XX 씨, 물 끓이는 법 배웠다 그랬지?"


- 네네. 다른 거 끓여본 적은 없는데 일단 물은 끓여봤어요.


상사 : "그럼 솔랸카(Солянка!) 끓일 수 있지? 우리 회사가 끓여 놓은 솔랸카가 있는데, 거기에 재료를 몇 개 추가해야 해요. 일정 어느 정도로 잡으면 좋은지 알려줘요."


- ㄴ ㅔ...? 솔랸카요...? 그게 뭔데요?


상사 : "그건 일종의 찌개야. 토마토랑 고기를 넣고 끓이면 되는 거라 금방 해. 메일 확인해봐요. 

        문서 보면 나와있으니까 보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



* 솔랸카(Солянка!) : 솔랸카는 토마토소스와 고기 국물로 끓인 신맛이 나는 러시아의 대표 수프다. 고기나 생선 육수에 토마토와 오레가노와 같은 향신료를 넣고 푹 끓인 수프로 식전에 주로 먹는다. 예전에는 세랸카라고 불렸다. (출처 위키백과). 이해를 돕기 위해 뭣 같아 보이는 음식 이름을 열심히 서칭 했다.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은 절대 없다. 이 대화는 비유고 나는 요리와 관련한 업무를 하고 있지도 않다.



상사는 내게 누군가 조리해놓은 솔랸카 한 솥을 준다. 메일함을 열어보면 문서가 몇 개 나와있다.

솔랸카를 끓인 후 상하지 않게 유지하는 법, 솔랸카가 상했을 시의 대처법. 솔랸카와 비슷한 우크라이나의 전통 요리에 들어가는 일부 재료에 대한 설명서.. 


문서가 많긴 한데, 정작 내가 원하는 대답은 여기에 없다.


"그래서 솔랸카가 대체 뭔데..? 레시피는 어디에 있는데..? 이걸 러시아 동부식으로 만들어 남부식으로 만들어..? 재료를.. 뭐 어느 타이밍에 넣으라는 건데..?"


나는 또 솔랸카를 열심히 구글링 한다. 근데 이 음식을 취급하는 블로거들도 몇 없고, 우리 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조리하는 사람들도 잘 없으며, 우리 회사만큼 대량으로 조리를 하는 사람들도 잘 없다. 



상사 : "XX 씨. 메일 봤어요? 일정 언제까지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아 저.. 제가 이게 뭔지 잘 몰라서 한 달은 걸릴 것 같은데요.


상사 : "안돼. 너무 길어. 그 정도 걸릴 일 아냐~. 2주 줄테니까 하도록 해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일단 하라고 하니까 나는 일을 시작한다.

냄비에 물을 붓고 냅다 끓여본다. 재료를 성큼성큼 썰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을 한다.




- 저.. 당근을 깍둑썰기해야 할까요, 어슷 썰기를 해야 할까요? 일단은 어슷 썰기를 하긴 했는데..


상사 : "그걸 어슷 썰기를 하면 어떡해."


- 아 그럼 깍둑썰기를 할까요?


상사 : "당연하지. 그걸 어슷 썰기를 하면 어떡해. 식감이 이상해지잖아. 그거 다 문서에 나와 있어.

          문서를 꼼꼼히 읽어봐야지."


- 아 넵. (문서에는 당근을 경상도식으로 썰어 넣으라고 돼있던데 경상도식 당근 썰기를 내가 어떻게 알아ㅠㅠ!!!)


상사 : "XX 씨. 조리는 문서 읽는 게 제일 중요해. 하나하나 꼼꼼히 봐야지. XX 씨 같은 문과는 이런 거 꼼꼼하게 안 보고 넘어가잖아. 이쪽에선 그러면 안돼."



나는 이제 여기서부터 삔또(?)가 상하기 시작한다.

내가 문과인 것과, 내가 문서를 꼼꼼하게 읽지 않은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괜히 질문을 했다가 내 출신 성분(?)까지 들먹여지는 상황에 위축된다.



상사 : "XX 씨. 재료를 볶긴 했어?"


- 네? 아니요. 그냥 끓였는데요. (내가 검색한 레시피에는 그냥 끓이라고 돼있던데ㅠㅠ!!!!)


상사 : "어허.. 재료를 안 볶고 끓여서 음식을 어떻게 만들려고 그래?"


- 아 네. 그럼 약불에 볶을까요 강불에 볶을까요.


상사 : "그건 찾아봐야지. 찾아봐~. 누가 다 알려주면 실력이 안 늘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래서 물어봤더니 명확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직원이 나를 도와주려고 하면 '내버려 두라'라고 한다. 행여 질문에 대답을 해주거나 피드백을 받는 날에는 더 많은 꼬투리들이 따라온다.


내가 문과라서 일을 이렇게 한다는 둥, 내가 공부가 많이 부족한데 야근을 안 한다는 둥..

내 조건과 노력을 폄하하는 말이 뒤따라 온다. 이런 '꼽주기'가 늘 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모르는 상황이 닥치면 멍을 때리게 대고 입을 더 다물게 된다. 몰라도 결코 질문하고 싶지 않다. 물론 욕설이 오가는 군대식 문화에 비하면 이건 새발의 피일 것이고 내가 예민한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예민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직장이 학교가 아닌데 왜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나?


맞다. 직장은 학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 지시가 매우 중요하다. 학교의 재량활동처럼 '가족을 그려보세요'하고 과제를 던져준다고 명화가 뚝딱 탄생할 수는 없다. 회사 구성원들의 각자 역량을 파악하고 그 사람이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적정한 업무를 주고, 그 업무를 위한 충분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 상사와 회사의 역할이다. 


그리고 저 말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꼰대다. 학교처럼 교육을 하라는 것과 업무 지시를 똑바로 하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해라"는 말 뒤에 필요한 부가적인 설명을 사치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업무 지시를 받았을 때, 철야를 해서라도 그 일을 해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일 테다.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도 꿋꿋하게 일을 해냈던 기억. 그 기억들이 그의 커리어적 자부심이다. 자신이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이 정도 실력을 가졌고, 후배들을 그렇게 관리해도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응 아니야.

나는 저 생각에 반대한다. 이런 식의 지시를 받은 뒤 내가 만든 결과물은 '솔랸카'가 아니라 '부대찌개'에 가깝다. 체계 있고 적확한 지시가 실력자를 기른다.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제도권 교육이 발달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는 것'과 체계와 절차와 형식을 갖추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다. 내가 생각했을 때 '맨땅에 헤딩'을 상사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덜 귀찮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곱게 알려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도 나는 반대한다. 정말 나를 위한다면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1대 1 과외식 업무 지시를 하라. 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일 것이다. 



요컨대, 직장이 학교이길 바라지 않는 상사들은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1. 업무 지시를 똑바로 해라. 업무에 필요한 교육을 하고, 업무 처리에 필요한 문서를 형식을 갖춰서 전달해라.


2. 질문하라고 하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미리 잘 전달해라.


3. 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해라.


4. 대답에 인신공격을 섞지 마라.


5. 당신의 '맨땅에 헤딩' 방식이 100% 옳은 것은 아니다. 아마 80%는 틀렸다. 당신도 체계적인 교육과 업무 지시를 받고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회사에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6. 이게 다 싫으면 어떤 개떡 같은 업무지시도 잘 알아듣고 절대로 질문하지 않아도 일처리를 잘하는 실력자를  체계적인 채용 절차를 통해 뽑아서 제대로 된 페이를 주고 모셔라.


7. 지금은 202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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