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로 신중하게 직업을 선택했고, 너무 늦은 나이에 첫 발을 뗐기에 커리어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 비전공자라는 출신 성분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내 분야로만 커리어를 꽉꽉 채우고 싶고, 전문성을 기르고 싶다. 큰맘 먹고 첫발을 디뎠을 때, 그때의 내가 꿈꾸던 직업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야 한다. 물론 실속 있는 커리어로 업계에서 몸값을 올리고 싶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회사는 이런 내 목표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어떤 한 소속사에 지원을 했고 거기서 아이돌로 데뷔를 했다. 그런데 소속사에서는 데뷔 이후 나에게 앨범을 작업하거나 무대를 서는 스케줄을 잡지 않는다. 대신에 예능 게스트로 계속 내보내거나 광고만 찍게 한다. 가끔 비싼 값에 제의가 들어오면 트로트를 부르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소속사에 들어갔고, 아이돌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아이돌로서 노래하고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러나 소속사가 내게 시키는 일은 아이돌 본연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며 간혹 아이돌의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이렇게 몇 년을 활동하다가 참지 못하고 소속사를 옮기려고 한다 치자. 바뀐 소속사에서 나는 아이돌로 활동하고 싶지만, 다른 소속사들은 내가 지금까지 예능을 잘 해왔고 트로트를 불러왔기 때문에 아이돌 특유의 퍼포먼스를 해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다. 게다가 나는 나이를 먹는다. 다시 연습생을 하기에도 상호 간에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딱 이 꼴이다.
친구들에게 지난 몇 달간 이런 비유를 들며 내 상황을 호소했다.
얘들아, 내 업무를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자면 난 블랙핑크가 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미스 트롯을 내보내는 상황이야.
맥락을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비유가 아이돌/예능/트로트 어떤 분야를 비하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그 분야 각각이 문화계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고, 각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길 바라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예능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이돌 무대만 서게 하고 트롯왕이 되고 싶은 사람을 개그콘서트에만 내보내면 안 되듯이 각자가 목표하고 계획한 커리어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나는 회사가 내가 지원한 업무와 무관한 업무'만' 시키는 것에 불만을 표한 적이 있다. 우리 팀장에게도, 회사 임원에게도 정식으로 이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
나 : 저는 트로트 관련 업무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아이돌을 모집한다고 해서 여기에 지원을 했습니다. 저는 아이돌 일을 하고 싶은데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이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상사 : 나는 벌써부터 XX 씨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 연예인은 다 하는 거다. 예능도 하고 트로트도 부르고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나 : 여러 분야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건 동의합니다만 저는 몇 개월 째 트로트만 부르지 않았나요. 아이돌 관련 업무를 병행한 것도 아니고... 아이돌의 창법이 있고 춤도 배워야 하는데 트로트식 꺾기만 주구장창 해서는 제 아이돌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트로트는 트로트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상사 : 하. 정말 이해가 안가네. 연예인은 원래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니까?
나 : 애초에 '아이돌'로 채용을 하면서 지원 요건에도 '아이돌식 창법, 댄스'만 적어두지 않았었나요? 그리고 연예인은 다 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회사에서도 아이돌, 예능인, 트롯인 다 분리해서 채용을 하는데 아이돌로 채용을 해놓고 연예인 업무를 전부 하라뇨.. 저도 곤란합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다.
어디, 신입이, 회사가 일을 주는 대로 해야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쏙쏙 하려고 해?
정말 구시대적이고, 이 회사가 왜 경영난을 맞았는지 아주 이해가 잘 되는 입장이었다. 회사는 개개인의 커리어 계획을 존중하지 않으며, 개개인을 각자 분야의 전문가로 양성할 생각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일을 되는대로 쥐어주고, 당장 급한 불만 끄면 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쟁쟁한 트로트 회사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트로트를 하기 싫어하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직원한테 트로트를 맡긴다? 그 트로트 무대가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수습 기간 동안에는 회사가 주는 이상한 업무 지시가 다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교육을 하나도 해주지 않고 떠맡긴 일도 어떻게 배워가면서 처리했다. 그런데 함께 아이돌 직군으로 지원했던 친구들과 나의 업무가 너무 다르다는 게 점점 보였다.
친구 1 : 너네 요즘 회사에서 뭐 해? 나는 요즘 랩 배우는데 학원에서 배웠던 것보다 비트를 잘 타야 해서 너무 어려워.
친구 2 :나는 요즘 안무 배우는데 생각보다 잘 맞아서 댄스곡 전문 아이돌팀으로 옮겨볼까 해. XX 이는 요즘 뭐해?"
나 : 나..? 어.. 나 요즘 꺾기 창법 배워..
친구 1 : 꺾기? 아 그 요즘 여자 아이돌식 창법 말하는 거야?
나 : 어? 음.. 아니..? 나훈아식 꺾기.
친구 2 : 엥..? XX이가 그걸 왜 해? 너 아이돌 전형으로 지원하지 않았어? 너 아이돌 엄청 하고 싶어 했잖아.
나 : 어 그렇긴 한데, 회사에 트로트 무대 설 사람이 없대..
친구 1 : 보통 트로트팀 따로 있지 않아? 우린 트로트 팀만 두 개야.
나 : 어..? 우린 아냐.. 우린 그냥 한 명이 트로트도 하고 판소리도 하고 예능도 다 해..
친구 2 : 야야 요즘 아이돌은 그런 것도 중요하대! 돈 많이 받으면 됐지.
나 : 나 연봉 XXXX원이야..
친구 1, 친구 2 : (숙연)
내가 하는 업무를 말하자 진지하게 내 커리어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물론 누군가는 아이돌을 목표로 했으나 트로트가 잘 맞아서 재밌게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이돌이 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내 주변에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디 가서 내가 늦은 나이에 진로를 바꿔가며 하게 된 일이 이 업무라는 것을 창피해서 말하지 못할 지경에 도달했다.
직원의 커리어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말은 곧, 회사가 각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걸 단순히 직원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치부하는 회사에 어떤 발전이 있을까. 회사가 언젠가 내 목표에 공감해주길 기다릴 수도 없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기르고 몸값을 키우는 동안 내게는 이른바 '물경력'만 쌓일 뿐이다. 물경력은 내 몸값을 올릴 근거가 될 수 없다. 반짝반짝 꿈을 꾸던 나는 짜게 식어갈 뿐이다. 여기는 잡무를 담당해 온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는 회사도 아니다.
지금 나는 회사에서 이기적이고 열정 없는 직원이 됐다. 여기에 대해 나는 어떤 변명을 하고 싶지도 않다. 조용히 이력서를 수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