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DOES MATTER
새 직장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며칠 만에 근로계약서를 썼다.
보통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공고에도, 면접 시에도, 최종 합격 통보시에도 듣지 못했던 수습기간 3개월 동안은 월급의 90% 지급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계약서는 쓰지 않았지만 며칠간 신나게 일을 하다가 저 내용을 보니 머리가 굳고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경력인데 수습기간을 둔다고?
└ 그렇지 수습기간 있을 수 있지. 근데 나 지난 며칠간 수습처럼 업무를 하고 있지 않은데?
└ 아냐 내가 모르는 업무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근데 3개월 간 90%는 좀 너무한 거 아냐?
└ 근데 90% 정도면 참을만하지 않나. 내가 너무 돈돈 거리는 건가?
└ 하지만 3개월 간 10프로나 까이면 내가 처음에 목표했던 연봉에 도달하지 못한 거잖아.
└ 맞아. 입사할 때도 내가 제시한 연봉을 이쪽에서 거절했잖아. 이런 것까지 참아야 해?
└ 그래. 아무리 일자리가 아쉬워도 그렇지. 그리고 돈 중요해!!! 돈 중요하다고!!!
이게 사실 90%라 하면..
진짜 남들이 보기에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또한 좀 더 긍정 회로를 돌린다면 수긍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근데 내가 불쾌한 점은 금전적인 페널티에 대해서 입사하고 며칠까지도 정말 어떠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습기간이 있는 경우 임금의 몇 %를 지급하는지 정도는 공고에 써놓는 경우를 많이 봤고, 적어도 면접에서나 합격 통지 직후에서는 고지해 주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은 정말 예측하지 못했다. 이걸 고려했다면 입사 전의 연봉 협상에서 내가 쉽게 물러나진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주변 친구들(t)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다들 하나 같이 "회사가 양아치"라고 해주었다.
사실 나는 3개월의 수습기간을 두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입사 첫날 필요한 설정을 마치고 이틀 째부터 바로 업무에 돌입했다. 나도 양심이 있어서 이게 수습 기간의 업무인지 아닌 지는 파악을 한다.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업무량에 대해서도 가늠이 선다. 솔직히 일을 조오오온나 많이 받았다. 개수로 따지면 하나지만, 그 양이 방대하고 기한도 짧다. 이미 프로젝트가 많이 지연된 상태라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어떤 환영의 분위기(?)도 없이 계약서도 쓰지 않은 시점에서 일을 이렇게 받는 게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떳떳했다.
계약서에 바로 서명하지 못하고 두 시간 정도 시간을 갖고 대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위에서 얘기했듯 나의 당황스러움을 먼저 얘기했다. 그리고 수습과 비수습 간의 업무 차이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일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이 회사에선 수습 수준의 업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없다고 했다.
그럼 왜 입사 전에 고지도 받지 않았는데 90%만 지급을 받아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실 이렇게 세게 말하지도 않았다.
입사 전부터 제가 자꾸 연봉 문제로 불편한 얘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열심히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불리한 조건을 말씀하시는데.. 이런 식이면 제가 이 프로젝트 끝나고 수습종료 당할까도 불안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 두 푼 아니라고 볼 수는 있지만.. 저는 입사할 때도 연봉을 회사에 맞춘 입장이니 이 정도는 조율을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일할 겁니다.. 구질구질..
대표는 난처해했다. 나도 말을 꺼내면서 '회사 사정이 어려울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이러는 건가' 하면서 자기 검열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다음 대표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솔직히 돈에 관계없이 열심히 좀 해주었으면 하는데.. 입사 전부터 계속 이런 문제로 그러니까(조율을 시도하니까) 연봉에 불만이 있으면 업무를 저기할까(열심히 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네요.."
이 말을 들으니까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근로자에게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겼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나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런 식의 계약과 대표의 말로부터 이 회사에 대한 판단을 끝냈다.
<돈에 관계없이>
이 말은 참 우습고 뻔뻔하다. 전 직장의 대표도 비슷한 훈계를 했었다. 그때도 당연히 이해를 못 했다. 여기는 다 돈 벌자고 모인 사람들인데 대체 왜 자꾸 돈에 상관없이 무얼 하라고 하는 걸까? 만약 반대로 근로자가 회사에게 <업무량에 관계없이 돈을 더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면 수긍할 회사가 얼마나 될까. 근로자들은 저런 말을 꺼내지도 못한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근데 회사는 그냥 돈을 떠나서 열심히 하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미안한 기색도 없이 한다. 회사 수익이 좋을 때도 그 이익을 직원과 나누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면서 말이다.
회사가 내 요청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며칠간 진짜 열심히 일했다. 진짜임ㅇㅇ 나도 내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말이다. 근데 정말 저 말을 듣고 나니까 모든 의욕이 사라진다. 아까는 화가 와락와락 났는데 지금은 머리가 오히려 정리가 된다.
그래 다 이해한다. 이곳은 사회 초년생과 젊은 직원들로만 이루어진 곳이다. 아마 나처럼 반복적으로 연봉에 대해서 재협상을 시도한 직원은 없었을 거다. 회사의 입장에선 내가 너무 속물처럼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이해한다. 월급의 10프로가 까이는 것? 내가 잠깐 허리띠를 졸라매면 된다. 하지만 내 돈과 시간은 내게 정말 소중하다. 나는 속세의 인간이고 돈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나.. 속물.. 맞다!
적당히 해야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할 일만 해야겠다. 사실 지금 일이 재밌어서 이렇게 말하고도 더 열심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3개월은 적당히만 했으면 좋겠다. 퇴근 후에도 업무 생각에 머리 싸매지 말 것. 두통과 안구통이 오면 그냥 쉴 것. 히스토리를 궁금해하지 말 것.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지 말 것. 정시에 칼같이 짐을 싸고 나올 것. 정 주지 말 것.
다시는 이런 식의 을이 되지 않기 위해 능력을 더 키울 것.
회사가 갑질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 참여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
이곳에 훌훌 털었으니 조금은 잊고 다시 열심히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