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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Oct 22. 2023

시-터뷰



타인이 되어보는 가장 빠른 길은 소설 읽기라 한다. 이렇게 정정하고 싶다. 타인이 되어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소설과 인터뷰 읽기라고. 인터뷰만큼 진솔하게 누군가의 이야기와 철학이 드러나는 콘텐츠도 없다. 소설이 가상의 세계를 경험하게 만든다면 인터뷰는 현실 그 자체다. 때문에 타인의 삶에 나의 상황을 대입해 생각을 바꾸거나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이는 내가 수많은 콘텐츠 에디터의 업무 중 사람을 만나는 일을 가장 설레하는 이유기도 하다. 특히 인터뷰는 누군가의 삶을 아무런 대가 없이 오롯이 경험하는 시간이다. 에디터처럼 인터뷰어가 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게다가 그 황홀경을 내 언어로 누군가에게 전하는 권한을 갖는다니. 당연히 두근거릴 수밖에.



두근거림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득 내가 콘텐츠를 핑계로 누군가의 삶에 침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에디터가 던진 질문으로부터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을 토대로 인터뷰이를 판단한다. 내 글이 인터뷰이의 얼굴이 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잘 듣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게 내 책임이자 소임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 ‘잘’이 참 얄궂다. 이 부사는 열 가지가 훌쩍 넘는 뜻을 등에 업고 내게 물었다. “어때 잘 할 수 있겠어?” 이때의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좋고 훌륭하게, 아주 적절하게 등 그 어떤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만큼 잘 듣는다는 기준을 찾기 어려웠다. 



원로 사진작가를 인터뷰할 때였다. 첫 질문부터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를 겨우 겨우 원점으로 끌고 와도 작가는 다시 한눈을 팔았다. 지나친 개입은 그의 삶을 침입해 내 마음대로 휘젓는 꼴이 되겠다 지레 겁을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진 구력은 50여 년 가까이 됐고 인생의 구력은 그보다 더 시간의 밀도가 높았다. 결국 몇 날을 준비한 질문지를 포기하고 그저 잘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들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잘 듣고 있다는 추임새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가 멀미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동공 지진이 올 것 같은 눈이 갈 길을 잃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니 내 질문은 무용지물이 됐고, 어차피 대답에 맞춰 흐름을 다시 터야 했다. 중심을 잃고 녹취를 믿기로 했다. 보통 인터뷰 녹취를 푸는 일은 인터뷰 시간의 두 배가량이 걸린다. 듣고 옮기고 흐름을 파악하고 대화를 매끄럽게 다듬는 일련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6시간을 넘게 녹취를 풀었더니 A4 용지로 15 페이지가 나왔다. 할애된 지면은 고작 매거진 페이지로 6페이지. 이제 명확한 방향을 잡고 불필요한 내용을 쳐내고 순서를 바꿔가며 질문과 대답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만 남았다. 워낙 긴 세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뺄 내용을 고르는 데 확신이 서지 않았고 결국 자선전 같은 장문의 인터뷰로 마무리했다. 에디터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이다. 인터뷰 기사를 읽은 동료 에디터가 “대단한 분이긴 한데 진짜 재미없는 분이네요.”라고 툭 던진 한 마디에 정곡을 찔렸다. 



그즈음 내 인터뷰는 대부분 비슷했다. 상대의 삶에 침입하면 안 된다는 강박은 대화의 주도권을 인터뷰이에게 넘겨주는 실수를 반복했다. 책임을 인터뷰이에게 떠넘기기 급급했다. 방향을 잃은 인터뷰는 자서전처럼 장황하고 촘촘했다. 타인의 삶에 내 상황을 대입해 보기에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질문의 주도권을 쥐고 놓아주지 않으면 작가의 말문을 막아섰다. 인터뷰이는 너무 짧은 답변으로 나를 당황시켰고 결과물은 읽을거리가 전혀 없었다. 유연함이 필요했다. 잘 듣는다는 말에서 부사 잘이 네 번째 사전적 정의 ‘자세하고 정확하게 또는 분명하고 또렷이’로 쓰여야 했다. 에디터가 질문으로 첫 주도권을 갖는다면 인터뷰이가 답변으로 언제든 물길을 다른 곳으로 틀 수 있도록 열린 귀를 기울였다. 더는 녹취를 믿지 않았다. 현장에서 인터뷰이의 답에서 건져 올린 실마리로 다른 길로 들어서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에 맞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 기사의 마지막 주도권은 결국 글로 풀어내는 내게 있고 읽히는 글을 위해선 물살이 하나의 흐름을 타야 했다.



A부터 Z까지 다 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누군가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분만 잘 오려내 콘텐츠를 만들었다. 주도권을 넘기고 넘겨받는 상황 속에서 큰 주제를 잃지 않으려 바짝 긴장해 대화를 이끌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머릿속으로 대화를 곱씹으며 한 가지 주제를 다잡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녹취된 내용 중 이와 맞는 답변만을 추렸다. 인터뷰이의 모든 면이 담기진 않았지만 어떤 인생의 한 국면이 함축적으로 표현됐다. 인터뷰의 방향이 더 명확해졌고 기사는 깔끔하게 떨어졌다. 사람들은 오히려 인터뷰이를 더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상상의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 같은 인터뷰가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그 후로 나는 좋은 인터뷰의 기준을 시-터뷰로 잡았다. 매일의 삶 속에서 결국 빛나는 부분은 순간순간이고 그 순간의 포착이 보는 이의 뇌리에 더 짙게 남았다. 마치 한 장으로 승부하는 사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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