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9회
일단 상담을 하러 오긴 하는데 뭔가 해결이 되긴 하는 걸까. 그날그날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하다 보니까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진중하게 파고드는 것 같지 않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이렇게 이야기만 계속하면 되는 걸까?
뭘 해결하고 싶은데요?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뭔가 해결하고 싶은 게 있다기보다는 이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다. 뭐랄까. 뭘 해도 어차피 나는 안돼 — 이런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뭔가 좀 활기찬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기분으로는 영원히 이대로, 이런 상태로 살아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미래가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든다. 머리는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고개를 흔드는데, 마음으로는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다.
웃긴 건 지금이 안락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도전을 하고 나서야 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그럴 의욕도 에너지도 없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락하다. 세상에 더 형편없는 경우도 많은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지낼 수 있어. 그런데 이걸 포기할 거야? 다시 세상으로 나갈 거야? 정말 그러고 싶은 거야?
한쪽에서는 조금 불만족스럽더라도 이렇게 안락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언젠가는 나의 시간이 끝날 거라고 말한다. 반대쪽에서는 그렇게 나에게 부여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 죽음이 나에게 닥쳐오기 전에, 뭔가 소소하게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지 않냐고 묻는다. 어느 쪽으로라도 마음이 정해지면 그렇게 살면 되는데, 어느 쪽도 완전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마음이 계속 불편하기만 하다. 체한 것처럼 계속 걸려 있다. 토할 수도 없고 눌러 내릴 수도 없어. 어떻게 해야 돼.
선생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굉장히 잔잔한 호수 같아 보인다고 했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아주 평화롭다고. 하지만 그 잔잔한 표면 아래로는 깊은 물길이 강한 물살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물에 빠지는 무엇이든 저 깊은 물속 바닥으로 끌고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표면만 잔잔한 호수.
한 직원이 ‘핌블스’라고 부르는 만화 캐릭터들이 인쇄된 공짜 스티커 증정 행사를 골자로 한 슈퍼마켓 프로모션을 고안하는 데 3개월을 보냈다는 소식에 대한 합리적 반응은 슬픔 뿐이다. 어른들이 왜 그렇게 치사하게 자신의 책임을 방기할까? 두건이 달린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이 어깨에 낫을 둘러메고 지평선에 나타나기 전에 한번 이루어보고 싶은 더 큰 야망은 없을까?
Three : 비스킷 공장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진학하면서 나는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다. 나에게 어리광이란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죄책감 없이 쓰는 것도 포함이었다. 나는 늘 부모님의 어려운 사정과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아이여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기댈 사람이 없어서 14살 무렵부터 정서적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었다. 철이 일찍 든 것이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그 연장선에서 경제적으로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서울에 부모님이 있고 살 집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원을 받은 거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하루가 끝나면 잠들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다는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 계속해서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신경이 점점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툭 끊어져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외국으로 나갔다. 카페에서 일하고 키위를 고르고 감자도 캐면서 —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면서 버텼다. 한국에서 신중하게 취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사회의 일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게 나한테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 대륙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겨우 가족에게서 신경을 끌 수 있었다. 비로소 그 관심을 나에게 돌릴 수 있었다. 숨을 쉴 수 있었다. 고군분투로 너덜너덜 해진 나의 20대를 잠시나마 반짝이게 만들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에서 나의 멘토들은 말했다. 현실은 보잘것없어도, 언젠가 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그걸로 잘 이어나갈 수 있게 될 거야. 그래,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겠지. 그런 꿈을 꿨다. 솜사탕 같은 희망을 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찾아 헤맸다. 도무지 찾아지지 않았다. 일은 언제나 경제적인 보상만을 제공했기 때문에, 나는 일에서 보람을 얻을 수 없었다. 돈과 보람은 도무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가 망가져서 나는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정말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게 적합한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격려받고, 무엇에 의욕을 얻고, 무엇에 만족하는 사람일까? 자아에 관한 이런 고민들은 대부분 사람이(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20대에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서른일곱에 문득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심란한 일이다.
술 없이 살기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나는 정신과에 가게 된 연유가 감정 조절이 잘 안 되기 때문에 — 즉, 컨트롤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어떻게 모든 걸 다 컨트롤하고 살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했다. 컨트롤해야 해. 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정서적 어른이 되어야 해. 경제적 어른이 되어야 해. 해야 하면 해야 해. 그렇게 살아왔고, 그 고정된 틀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잖아요. 붙잡고 있는 걸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선생님은 내가 상자에 담긴 구슬 같다고 말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처럼, 꿰어야 보배인데 지금은 그냥 알알이 나뉘어서 상자에 — 아마 좋은 상자도 아닐 거고 성냥갑 정도 되겠지 — 담겨 있다고 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구슬을 언제 꿰지’와 ‘굳이 꿰어야 할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사실 이건 뭘 하겠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아왔구나를 인정하는 일에 더 가깝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 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미안해해야 했고,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할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원하는 걸 뭐 굳이 다 하고 살아야 하나 — 그렇게 스스로의 욕구와 능력과 존재 자체를 평가절하시키고 부정하며 살아왔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지금껏 그렇게 잘 누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꾹꾹 눌려있던 온갖 욕구들이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나약한 디스크가 버티지 못하고 터지듯이.
무슨 일을 하든 생활비가 나올 정도면 되니까, 하는 일에 그냥 만족하면 될 것 같다고 머리는 생각한다. 문제는 망할 마음이 더 이상 머리를 따르지 않는다. 선생님은 현상유지를 하려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가지고 있는데, 동시에 이상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현실과 이상이 타협이 안되고 있는 상황에서, 억지로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현상 유지나 하자, 하고 뭉개고 앉아 있다가 이상이 꿈틀대면 흔들렸다가 — 그걸 지치지도 않고 계속 반복하고 있다. 일에서는 보람도 즐거움도 찾을 수 없으니 취미 생활이라도 해보자 했지만, 그걸로는 이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지금 어디론가 박차고 나간다고 해서 해소가 될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계속 뭉개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삶이 안락한 건 맞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락함. 선생님은 그 안락함이 공허한 안락함이라고 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건 쏙 빠져있고,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라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어느 책에서 말하던데, 나는 벌써 수 천 번을 흔들렸는데도 어른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뭐가 문제냐고 대체.
생각이 그렇듯이 감정도 결코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열차처럼 앞에서 감정을 끌어당기는 힘이 늘 존재한다.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아무래도 해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피곤하네,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