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8회
제주항공 참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유가족 분들의 사연이 담긴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진다. 이 감정의 홍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주기적으로 혼자 그런 상상을 하면서 가슴 찢기는 고통을 받는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러면서 백신을 맞듯이 약간 대비가 되기를 바란다. 대화가 작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쪽으로 흘렀다. 할머니는 내가 외국에 나갈 때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돌아와도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 건강하게 잘 계셨다. 내가 방랑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10년 넘도록, 아주 정정하게 시골집 방 한 칸에서 작은 TV와 시간을 보내셨다.
머리로는 할머니 연세가 많으시니까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뵙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령으로 인한 약간의 고혈압을 제외하면 건강 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90세를 넘기시고도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인 목욕도 스스로 하셨다. 머리로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렇게 정정하신데 대체 무엇 때문에 돌아가신다는 말이야, 하며 머리를 의심했다.
할머니는 94세 생신을 두 어달 남기고 돌아가셨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디가 편찮으셨거나 넘어져서 다치셨거나 하는 일 없이. 본인께서 몇십 년 간 지내신 방에서 조용히. 방 한쪽에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외삼촌이 발견했다. 수도 없이 상상해 봤던 일이고, 그러면서 눈물도 찔끔 흘렸던 일이었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는 마음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돌아가셨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내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어떤 슬픔은 별의 속도와 비슷하기도 할까 생각한다. 우리가 보는 별은 사실 이미 소멸한 지 오래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실 몇십 년 전에 뿜어낸 빛인 것과 같이.
나의 코미디언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에서
모든 일을 미루고 할머니가 계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늦은 밤이었다. 외삼촌이 할머니를 발견한 시간이 대략 오후 5시쯤이었다. 각종 서류 제출과 장례식 준비를 당일에 마무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할머니는 영안실에 안치되셨다. 영정사진조차 없는 장례식장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외삼촌 댁으로 갔다. 엄마랑 나는 늘 할머니랑 같이 할머니 방에서 잤는데, 그날도 그랬다. 할머니만 안 계실 뿐, 달라진 건 없었다.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딱딱한 침대도, 이불장에 켜켜이 쌓인 이불도. 할머니 방 특유의 냄새도 그대로였다. 먼지가 눌어붙은 블라인드와 오래된 거울 뒤로 아주 큰 달력이 걸려있었다. 날마다 할머니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 두자씩 메모를 해두신 게 보였다. 엄마랑 내가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러 왔던 10월의 어느 날에도 우리가 다녀갔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울면서 할머니 장롱에서 자꾸만 물건을 꺼냈다. 통장뭉치, 도장, 엄마의 결혼사진, 낡아빠진 동전지갑, 할머니가 허리띠로 쓰시던 옷을 잘라 만든 줄들. 나는 달력을 떼서 바닥에 펼쳐 한 장씩 넘겨보며, 그냥 거기 있었다. 물건의 홍수 속에. 할머니가 동네 아랫길에 사시는 한옥집 할머니 댁에 마실 가신 것 같았다. 이 밤에 마실은 왜 가신거람. 엄마는 왜 자꾸 우는 걸까. 눈이 빨개져서는 계속 우는 엄마를 달래서 할머니가 없는 방에 둘이 나란히 누웠다. 이상한 하루가 어서 끝나길 바라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장례식장으로 갔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뭘 먹긴 했던 것 같다. 상조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상복을 입었다. 지방에 사는 동생네 부부가 조카들을 데리고 와서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외삼촌은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여기에 서명을 하고 저기서 돈을 찾고 서류를 제출했다. 휑하던 빈소에 영정사진도 걸렸다. 21세기의 영정사진은 디지털이라, 사진을 주면 누끼를 따서 올려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 뒤로 햇살이 비치고 구름이 흘러가는 영상이 계속 지나갔다. 할머니가 정말 좋은데 계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후에 입관식을 하러 갔다. 엄마는 뭘 굳이 다 같이 가냐고 만류했다. 우리는 임종을 보지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조카들까지 다 챙겨서 지하에 어느 한기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아주 작게 돌돌 말린 상태로 가운데 누워계셨다. 한 명씩 인사를 드리라고 하길래, 내 차례에 누워계신 할머니 머리맡에 섰다. 이미 여러 번 만져본 주름이 깊게 파인 이마를 만져봤다. 광대가 높은 할머니의 마른 볼도 만져봤다. 얼음장 같아서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 냉기가 손에 닿으니 현실감이 확 끼얹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전 처음으로 울음이 온몸을 흔드는 경험을 했다.
애도는 얼마 뒤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말이다. 내 어머니는 지난 4월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하고 11일 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여름 대부분 얼빠진 상태로 보냈다. 멍했다. 얼떨떨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극심한 공황에 빠졌다.
회복으로 가는 먼 길에 대하여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놀라운 건 이 모든 것들이 정말 놀랄 정도로 금방 괜찮아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어디 좋은 데로 멀리 여행을 떠나신 것 같은 기분.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매일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차분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상실감은 내 모든 상상력을 쥐어짜더라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깊이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그런 상상을 해왔다. 기꺼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왔다. 그러면서 대비가 될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믿음에 금이 가버렸다. 끔찍한 상상을 수십 번씩 하면서 가상의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그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실제를 경험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구나. 그런 큰일이 두려워서 미리 생각하고 상상하고 온갖 난리를 피우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그 순간이 왔을 때 무너지지 않는 건 아니구나. 두려움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
할머니는 함께 살지도 않았고 자주 뵙지도 못하던 분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나 슬펐다. 그다음은 부모님이겠지. 아무리 아버지가 미워도 막상 돌아가시면 슬플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담. 아버지에게 가족은 우리가 아니라 여전히 본인의 형제들이다. 우리는 안중에 없다. 사실상 나는 아버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여전히 그런 아버지에게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해 미안함을 느낀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같이 밥을 먹는 게 분명 싫고 불편하다. 그 싫고 불편한 자리를 거절하면서 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까. 정말 이상한 심리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들한테만 잘해주려고 해도 빠듯한 인생이다. 왜 나한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는 사람한테 잘해주지 못한 게 미안하지. 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양육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필요로 했을 때, 곁에 있어준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아버지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몇 개 듣고는 농담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 아니냐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 정말로 삼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 자기 내킬 때나 가끔 와서 용돈이나 주고 가는 그런 사람. 나에게는 아버지의 자리는 있는데, 그 자리가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 그 자리는 언제나 공석이었고, 나는 그게 늘 불편했다. 슬펐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함께 하다가 떠난 사람은 애도할 수 있지만, 애초에 함께 한 적이 없는 존재의 부재는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가진 적도 없는 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해.
우리는 분명 그를 잃어버렸는데, 나는 원망할 수도 마음껏 통곡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이별에는 어떤 장례도 없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모든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몸을 일으켜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차를 내려 마셨다.
파더스 어드벤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에서
아버지는 한 번도 책임감 있게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죄책감이 없다. 선생님은 그 죄책감도 내가 지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무한 책임감에 빠져있고 무한 책임감은 결국 무한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면이 있다고 답했다. 내가 모든 걸 다 책임질 수 없고 모두를 다 안고 갈 수도 없는 건데, 그걸 놓지 못하니까 계속 내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책감이 든다. 비단 부모님뿐만 아니라, 회사에 다닐 때에는 회사 동료들에게,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에게 — 정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책임감은 덕목이지만, 무한 책임감은 나를 괴롭히고 있고 그래서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람들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어느샌가 무한 책임감이 발동하고, 나는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탁하지 않은 일까지도 책임감을 가지고 한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감정에 예민해지고 영향을 받는다. 여러 가지로 사는 게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는 늘 선선한 거리를 원한다.
오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모든 게 결국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생님이 마무리를 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니까, 유한한 시간 동안 사랑도 하고 지지고 볶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선선한 거리를 원한다. 밀접한 거리에 있어야 사랑도 하고 지지고 볶고도 하는데, 나는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싫어서 거리를 둔다.
그러면 사랑도 할 수 없잖아요, 선생님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