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7회
지난주에는 앉아서 할 말을 한참 동안 찾지 못했는데, 오늘은 생각해 온 게 있어서 괜찮을 거라 믿으며 상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운을 뗐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겠지.
지난주에 배려를 받고 싶지만 받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게 불편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어요. 아마도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서 배려를 받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편했던 것 같아요. 기본적인 스탠스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다’니까, 배려를 받는 것도 이게 다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그래서 굳이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잘 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해주겠어요. 애당초 그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인 거죠.
자리에 앉아서 몇 초 지나지 않아 말을 후두두 쏟아냈다. 선생님은 그 말도 안 되는 걸 왜 바라는 것 같냐고 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 이유가 뭘까? 이유…? 그렇게 복잡한 건 모르겠고, ‘아쉬운 소리’라는 말이 나오니까 갑자기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살면서 여러 번 경제적인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중에서도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잡고 갚지 못할 돈을 빌려서 집이 넘어갈 상황을 만든 게 가장 컸다. 그걸 정신 못 차리고 2번이나 했다. 그때마다 사회생활도 하지 않았던 엄마가 이리 빌리고 저리 빌려서, 집을 줄이고 이사를 해서 막았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네 아빠는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는 어디 가서 10원 한 장도 빌려온 적이 없다.”
아빠는 본인이 벌인 일을 마무리할 줄 모르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도 못하는 위인이라, 그 빚을 해결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전업주부인 엄마와 미성년자인 나의 몫이었다. 아빠는 본인 형제들한테도 돈 한 푼 빌리지 못했고, 심지어 빌려준 돈조차 받아내지 못했다. 여러모로 정말 책임감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무슨 복이었는지 젊었을 때는 돈을 꽤 많이 벌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돈이 없어지고 나니 그 많던 사람들도 다 사라졌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좁아지고 나이가 들면서 외로워졌을까. 자꾸만 엄마나 나한테 같이 어디 놀러도 가고 밥도 같이 먹고 했으면 좋겠다고 치댔다. 본인이 기분 내킬 때만 건네는 생활비, 용돈, 식사 대접 — 그런 모든 게 다 싫고 지긋지긋했다.
아빠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자기가 밥을 살 테니 오라고 불러서는 먹을 게 얹힐 정도로 엄마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유치해진다고, 애도 아니고 대체 반찬투정은 왜 하는 건지. 60대가 아니라 6살이 된 거냐고. 자식 된 도리니까, 싫어도 꾸역꾸역 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그런 소릴 들었다. 그래도 그때는 아빠가 좀 짠하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먼지만큼은 쌓여 있었다. 그러다 부모님이 살던 집이 재개발이 되면서 이사를 가야 했던 몇 년 전에,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요청했다가 묵살당했다. 보증금을 보태달라는 게 아니었다. 월세를 보태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이사비라도 내달라고 한 거였다. 그 몇 백만 원도 주기 싫어서 끝까지 못 들은 척하고 몇 달 동안 뭉개는 걸 보고, 아버지가 자기만 아는 지극히도 이기적인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마음에 먼지처럼 남아있던 “짠하다“는 감정이 싹 털렸다. 아버지는 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건 얻어내는 사람이었다. 우리한테 만큼은. 불쌍한 척을 하든, 화를 내든, 모른 척하든 — 사람을 좀 지긋지긋하게 만들어서 늘 원하는 대로 자기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게끔 만들었다.
이런 경험이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계량화하기는 어렵고, 살아가면서 장기간에 걸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바는, 당시에는 이런 일이 이상하게 일상적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이 경험이 세상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내 신념에서 표출되었다는 것뿐이다.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 아래 안전하지 못하다면 달리 어디서 경계를 늦출 수 있을까?
신체 폭력이든 비신체 공격이든 이런 일촉즉발의 사건이 일어난 후, 실낱같은 희망이기는 해도, 가해자가 후회하며 더 나은 행동을 보일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실제로 지켜질 것 같지 않은데도, 가해자의 공허한 약속은 여전히 사악하리만치 마음을 혹하게 한다. 이런 순간에 가해자는 보기 드문 나약함, 애정, 솔직함을 드러낸다. 이것이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켜 학대자의 비뚤어진 논리에 저항하기가 어려워진다. 아이가 원하는 건 학대하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뿐이고, 이 욕구는 아이의 정신건강과 안전을 희생해 가며 집요하게 지속된다.
폭력의 역사
『가난사파리』 중에서
더 이상 아버지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다 — 이건 내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 이건 내 머리다. 마음과 머리가 내 양팔을 잡고 양쪽으로 나를 찢어내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걸 해주긴 하지만 감정적 교류는 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게 어떻게 분리가 되냐고 물었다. 글쎄, 나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감정적 교류는 피하고 그냥 내가 할 도리, 즉 할 일만 하고 떠난다. 예전처럼 할 일을 하고도 옆에 앉아 안부를 묻거나 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왜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하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 DNA 말고는 준 게 없는데, 나는 왜 계속해서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하는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나는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한테 도덕적으로 옳게 살고 싶냐고, 아버지는 도덕적으로 옳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서 범죄를 일으키거나 우리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고 나와 내 동생에게 부모 된 도리는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아버지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한 번 더 짚어서 결론을 내렸다.
수년 전에 아버지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대로 못 살겠다며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말을 오래도록 기다린 사람처럼, “그래, 이혼하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서류라도 가져다주겠다고. 작성도 해줄 테니 도장만 찍으시라고. 아버지는 그대로 입을 다물더니 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정말로 이혼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이혼을 무기로 나를 협박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내가 엄마에게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타이르는 것이었을 게다. 나는 그런 협박에 놀아나기는 머리가 너무 커버렸고, 아버지는 그 후로 이혼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알았나? 이런 것조차도 너무 찌질해.
인생은 전쟁 중인 가족들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지점으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것 같다. 우리는 싸움이 헛됨을 깨닫고 피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걸 의미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끔씩만 찾아가 만나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로 유일한 해결책은 용서하고 잊는 것이다. 그 외에 것은 우리의 분노가 얼마나 정당한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아프게 할 것이다. 보통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한 사람들 자신이 어느 시점에는 마찬가지로 부당한 취급을 당하기 마련이다. 다른 이들로부터 해를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그걸 되갚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다양한 단계에서 얼마간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하지만 자신이 해를 입은 때만을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건 당연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가난사파리』 중에서
살면서 부모님이 이혼하면 어떻게 될지 여러 번 생각해 봤다. 엄마는 자유분방하게 더 잘 살 거 같았고, 아버지는 고독사 1순위가 될 거 같았다. 예전에 아버지와 연을 끊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버지가 고독사했다는 연락을 받고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딸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수습하고 나서 그분은 우울증이 걸렸다는데, 나도 그럴 것 같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로 고독사를 하게 된다면, 그 일은 내 남은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만한 사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그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냐고 물었다. 이미 병에 걸려 있잖아요, 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무슨 병에 걸려 있냐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우울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도 선생님이 가만히 나를 보고 계셔서 불안장애와 분노조절장애를 덧붙였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내가 내 자신이지 못하다고 했다. 나라는 것 — 그게 뭘까. 나는 나 자신이지 못한 것 보다도 내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되려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 일 수가 없다.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걸까? 아니길 바란다. 어쨌거나 내가 나를 알고 있다면, 순도 100%의 나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고, 50%의 나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선생님은 그게 잘 이해가 안 가시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라는 사람이 순도 100%인 상태가 있다면, 사회적 공간에서는 그걸 다 보여줄 수 없고 숨겨야 하는 부분들이 생긴다. 그래서 100% 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고 했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직장 동료에게 쏟아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언제는 20%의 나였다가, 어디서는 50%의 나였다가, 그러다 나의 안식처 — 집에 돌아오면 비로소 100%의 내가 된다. 나는 늘 그렇게 나를 얼마나 외부세상에 오픈할 것인지 조절하면서 살아왔다.
선생님은 그 모든 버전의 내가 통합된 상태가 아니라 다 쪼개져서 파편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 30%의 나와 100%의 내가 충돌하는 일도 생기고, 마음 따로 머리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거라고.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기성품처럼 나 자신을 대하고 있다고 — 여기서는 30%인 나를 내보내고, 저기서는 50%인 나를 내보낸다. 선생님은 그 모든 가정사를 지나면서 엄마도 힘들었겠지만, 나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애쓰며 살아왔다고 했다. 가진 힘을 다 쥐어짜서 써버려서 이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것 같다고, 숨이라도 붙어있기 위해서 그걸 위협하는 것들을 모두 차단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런 평가가 좀 혼란스럽다.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진 않은 거 같은데… 선생님은 그 상태가 바로 인지부조화 상태라고 했다.
인생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뭐가 잘못되었나 분석하고 평가해서 버릴 건 버리고 해야 하는데, 나는 어려운 문제를 각 잡고 고민해서 푸는 게 아니라 답지를 보고 그냥 대충 이런 거구나, 하고 넘겨버려서 다음에 또 같은 문제를 만나도 풀지 못하는 거예요. 인생은 대충 다 이래, 한국 사람은 이래, 자식 된 도리가 그렇죠, 뭐. 그러니까 이런 두루뭉술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어요. 그런 두루뭉술한 일반론이 내 인생의 정답이 아니에요. 내 인생의 정답지는 나만 가지고 있는 거예요. 물론 차단하고 안 봐야 살아남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은 건 잘했어요.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게 맞진 않아요. 어릴 때는 자전거를 탈 때 세발자전거를 타지만 어른이 돼서도 세발자전거를 타는 건 아니니까. 선생님이 길게 설명했다.
지금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버지와 애써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내 아버지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사람은 또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할 거고 나는 그 요구를 들어주면 화가 나고 안 들어주면 마음이 불편해질 거다. 선생님은 어떻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고, 그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아버지를 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식이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할지 생각하는 건 자식의 몫이 아니고 부모의 몫이라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슬퍼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돈을 들여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한계니까 얼마나 슬퍼요. 그런데 슬프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안 슬프려고 힘을 주고 있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요. 그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이런 부모를 만난 게 내 잘못은 아닌데. 나를 위해 마음껏 슬퍼할 힘조차 남아있질 않다. 속이 아주 건조하다. 눈물도 나지 않고, 감정적인 동요도 없다. 선생님의 말에 앵무새처럼 “맞아요, 슬픈 일이죠. 슬픈일이네요.“라고 남일처럼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