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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Dec 04. 2023

피렌체, 르네상스의 문을 열다

고대를 넘어 근대로 나아가다

신간 <세상 인문학적인 미술사>에 담긴 내용을 일부 편집하여 업로드한 내용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우리는 흔히 어떤 분야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1930년대는 한국 문학의 르네상스 시대였어”, “한국 축구의 르네상스는 뭐니 뭐니 해도 2002년 월드컵 때였지” 같은 식으로 말이죠. 굳이 이런 표현을 붙이지 않더라도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왠지 멋지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도대체 르네상스가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인상을 전달하는 걸까요?


르네상스란 재생, 갱생, 부활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14~15세기경의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다시 되살려내고자 했던 일종의 문예부흥운동을 말하죠. 이러한 변화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는데요. 그럼에도 프랑스어가 붙은 이유는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가 르네상스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라는 인물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을 출간하며 그 이름을 공식화했죠.


서양사의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개념으로 이해를 확장할 경우 르네상스에는 종교개혁, 대항해시대 같은 굵직한 사회적 현상들이 포함되기도 하죠. 우리가 이 시기를 새로운 시대 혹은 부흥기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게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단어에 담긴 뜻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르네상스인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활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원전으로의 복귀를 외쳤어요. 고대부터 전해져온 작품들에 관한 기존의 주석을 거부하고 오로지 원전에 집중함으로써 작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인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고대로 되돌려야 한다고 보았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이들은 고대의 원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교회 등 중세의 지적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습니다. 즉, 이들은 고대를 통해 중세를 넘어 근대로 나아가는 힘을 길렀던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도대체 왜 중세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던 걸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층 시민들이 운동을 주도했어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법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는지,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나라가 운영되어야 하는지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중세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던 스콜라 철학과 기독교 신앙은 이들의 필요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이는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오직 신을 섬기고 모시는 성직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점차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인 니콜라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책 <군주론>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통해 통치자에게는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용기, 단호함, 기민한 판단력 같은 자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비난받을 행동을 하더라도 결과가 좋다면 이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죠. 지도자에게 겸손과 정직, 동정심 같은 가치를 요구한 기존의 정치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 거예요. 현실과 동떨어진 가치가 아니라 실제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정치적 역량과 기술을 갖추는 것을 통치자들에게 요구했던 겁니다.


현실의 가치를 택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축적한 이탈리아의 신흥 부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택했습니다.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거죠.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랜 기간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입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주인으로 만든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1464)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로마 제국 출신의 철학자인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 1355-1452)을 초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를 공부했고, 이탈리아 최고의 석학으로 손꼽혔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를 불러 플라톤 아카데미의 운영을 맡겼죠.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후원은 미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서양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은 물론,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수많은 거장들을 후원했던 거죠.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거장’이라는 표현을 쓰냐고요? 지금부터는 그들과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초기 르네상스를 이끈 예술가들

예술만큼 르네상스 문화의 빛나는 순간을 잘 보여주는 분야가 또 있을까요? 이탈리아인들은 인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진정한 문예부흥의 조건으로 여겼습니다. 메디치 가문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은행가, 사업가들이 시인과 화가를 후원하고 새로운 작품을 주문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요. 르네상스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이전 시대, 즉 중세의 문화와 가치관이 무 자르듯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교회의 힘은 강력했고, 사람들의 신앙심도 깊었어요. 당연히 미술 작품의 주제도 여전히 종교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죠.


동시에 분명한 변화도 감지되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기에는 크게 네 가지 회화기법의 혁신이 일어났어요. 우선 첫 번째는 원근법입니다. 원근법이란 2차원적인 평면 위에 3차원적인 공간감과 거리감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브루넬레스키의 발견 이후, 마사초가 최초로 회화에 활용하였으며, 우첼로의 손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법은 유화입니다. 유화는 안료를 기름에 녹여 사용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에도 존재하던 기법이었지만, 15세기경 재료와 기법면에서 큰 발전이 이뤄졌고, 르네상스 시기부터는 아예 주요 형식으로 자리 잡았죠. 세 번째 기법은 명암대조법입니다. 말 그대로 밝음과 어두움을 차별화하는 것이죠. 그림 속 인물이나 물체에 비친 빛을 더 밝게, 주변이나 배경은 더 어둡게 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어두운 부분으로부터 밝은 부분이 떠오르듯 보이게 되어 평면으로부터 대상이 도드라져 보이는 느낌을 주죠. 마지막 네 번째 기법은 피라미드 구도입니다. 측면 초상이나 격자 모양 수평선에 맞춰 인물을 배치하는 딱딱한 방식을 벗어나 3차원적인 구도를 갖게 된 것이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이 방식을 적용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조토 디 본도네, <붙잡히는 예수>, 1305년


미술 분야에서 르네상스의 관념이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 이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조토는 중세 후기 고딕 미술기와 르네상스 시기가 겹쳐지는 시기에 활동했다고 알려지는데요.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가던 치마부에(Cimabue, 1240?-1302?)가 바위에 양을 그리는 조토의 모습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그를 제자로 삼아 피렌체로 데려왔다고 하죠. 이밖에도 조토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치마부에가 그리던 그림 위에 파리를 그렸는데 돌아온 스승이 진짜 파리가 앉은 줄 알고 손을 휘저어 쫓으려 했다는 이야기, 아무런 도구 하나 없이 완벽하게 원을 그려서 교황의 감탄을 자아냈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죠. 조토의 정확한 생애와 행적 등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그가 르네상스의 첫 번째 예술가로 평가받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깊이감과 뛰어난 기교는 우리가 드디어 새로운 세계로 넘어왔다는 선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건축가이자 미술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유적지를 측량하고 건축물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어요. 물론 그것이 단순히 고대의 건물을 그대로 모방하려는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과거의 미술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조하고자 노력했어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1420~1434년


특히 당대에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지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일명 두오모 대성당의 돔 지붕을 얹는 도전에 성공하면서 그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돔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은 여덟 번째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앞서 말한 ‘원근법’도 그가 발명했다고 알려집니다. 자신이 설계할 건물이 완성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고심하던 중 이 방법을 찾아냈다고 하는데요. 이후 원근법은 오랜 기간 서양 회화의 기초로 자리 잡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에 이어 초기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는 마사초와 도나텔로, 보티첼리 세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워낙 어리숙하고 지저분했던 탓에 ‘어줍은 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요. 미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마치 고딕 건물의 기둥처럼 인물을 묘사하던 기존과 달리 실제와 유사한 형태로 인간을 묘사했습니다. 명암을 일관되게 표현했고, 등장인물의 개성도 분명하게 살려나갔죠.


마사초, <종교세를 내는 예수와 제자들>, 1426년


잠시 그림을 함께 보죠. 바로 피렌체 브란카치 예배당의 벽화인 ‘종교세를 내는 예수와 제자들’이라는 그림인데요. 그림에 담긴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이 앞을 가로막곤 성전에 들어가려면 세금을 내라고 이야기했죠. 그러자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호수로 가봐라. 물고기 한 마리가 잡힐 텐데 그 입 속에 금화가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호수로 가보니 정말 물고기가 있었고, 입 안에는 금화가 있었죠. 베드로는 그 돈을 가지고 와서 관리인에게 가져다주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에 동일인이 여러 번 등장한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장면, 예수의 지시를 듣는 장면, 관리인에게 돈을 건네는 장면에서 총 세 번 등장하고요. 관리인도 예수 일행을 가로막는 장면과 베드로에게 돈을 받는 장면에서 연달아 나타나죠. 지금 우리에게는 낯선 방식이지만, 이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에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림이 가로로 길게 그려진 것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이런 방식은 차츰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의 그림에는 한 장면만 그려 넣음으로써 논리성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도나텔로, <다비드상>, 1430-1433년경


마사초가 회화에서 돋보였다면, 도나텔로(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1466)는 조각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쳤습니다. 그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를 재발견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콘트라포스토란 ‘대칭적 조화’라는 의미로 무게를 한 발에 집중하고 다른 발은 편안하게 놓고 있는 동작을 말합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그의 조각은 마치 로봇인 것처럼 뭔가 딱딱하고 불편한 느낌을 주는 이전 시대 조각과 달리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실물 같았던 나머지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 주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마지막 인물인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작가로 유명합니다. 도나텔로와 마사초가 사실주의적인 작품에 집중했다면, 보티첼리는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우아한 운동감과 관능미가 넘칩니다. 이를 두고 영국의 미술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 1909-2001)는 그가 그린 인물들이 ‘보다 덜 단단해 보인다’고 표현했을 정도죠. 보티첼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다수 그렸습니다. 이는 인문학 분야에서 일어난 고대 고전 부활의 움직임이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이후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유력가의 주목을 받으면서 더욱 각광받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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