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형 Dec 01. 2023

서양 미술의 출발점, 고대 그리스 미술

미술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 서양 ‘문명’의 시작을 알리다

여러분은 ‘그리스’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몇 년 전 벌어진 디폴트 사태를 떠올리는 분들을 제외하곤 아마 대부분 비슷한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웅장한 규모의 파르테논 신전과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아름답고 멋진 조각상, 고도로 발전한 문화와 예술 등을요. 그러니까 ‘서구 문명의 요람’이라는 수식어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눈부셨던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무형적 유산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가 처음부터 자신들만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발전한 주변국의 문화와 기술을 수입하는 입장에 가까웠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히타이트인들을 통해 제철 기술을 터득했고, 페니키아인들에게는 문자를 배워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리디아인들을 통해 화폐를 주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이집트인들의 발전된 건축 기술과 예술을 배워왔어요. 심지어 신화 속에 담긴 그리스의 신앙체계도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여러 문명의 종교를 참고해 만든 것이었죠.


고대 그리스는 이른바 폴리스(polis)라고 불리는 작은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폴리스는 원래 ‘성채’ 또는 ‘요새’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해요. 전쟁이 끊이지 않던 고대 그리스 초기,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고 모여 살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극도로 위험한 시기가 지나갔고, 성채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폴리스라는 단어는 ‘국가’나 ‘도시’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바뀌게 되었죠. 폴리스에는 적게는 2,000명, 많게는 1~2만 명 정도의 시민이 모여 살았습니다. (노예 등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포함하면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돼요.) 인구만큼이나 영토도 작은 편이었어요. 일례로 주요 폴리스 중 하나였던 아테네의 면적은 약 1,700제곱킬로미터였습니다. 이는 1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약 6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크기이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50년경


대표적인 폴리스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었습니다. 같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이지만 둘의 성격은 크게 달랐어요. 우선 아테네에는 그리스인 중에서도 이오니아인이, 스파르타에는 도리아인이 많았습니다. 아테네는 바다에 인접한 도시답게 강한 해군력을 자랑했고, 스파르타는 내륙에 위치한 탓에 육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라였죠. 또한 아테네는 다수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정의 성격을 지닌 반면, 스파르타는 소수의 지배 계층이 통치하는 과두정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 체제만큼이나 사회적인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아테네는 개방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문화를 지닌 반면, 스파르타는 집단을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건축과 예술은 물론, 문학, 철학, 과학, 의학, 정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스승과 제자 사이로 엮인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와 플라톤(Plato, BC 428/427-BC 424/423),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의 사상은 이후 서양 지식사의 향방을 가르는 역할을 했어요.


우선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의미의 ‘무지의 지’를 설파했습니다. 이는 후대 지식인들이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개인은 물론 인간 전체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죠.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완벽한 세계를 상정한 ‘이데아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림자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 혹은 사물의 불완전한 복사물이듯,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또한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복사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이죠. 그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 ‘이성’을 토대로 이데아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감성적 측면보다는 이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서양 지식사의 흐름이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스승의 입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이데아의 세계보다 우리가 지금 직접 마주하는 현실 세계를 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죠. 그는 아테네에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활발한 교육 및 연구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형이상학, 윤리학, 논리학 등 철학 분야는 물론, 물리학, 식물학, 정치학, 시학 등 수많은 학문의 기초를 세웠죠.


영원할 것만 같던 고대 그리스 세계는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아테네를 주축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벌인 이른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전체의 몰락을 야기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것은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었지만 그리 안정감을 주지 못했고, 이로 인해 100년 가까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게 되었죠. 고대 그리스를 구성하던 폴리스들은 인적, 물적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결국 북방의 마케도니아 왕국에 예속되고 말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서양 ‘미술’의 시작을 알리다

그리스 미술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 정복되기까지 약 9세기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리스와 남부 이탈리아, 에게 해 등지가 주요 무대였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접한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예술 분야의 경우 고대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지대했죠.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오랜 기간 자신들이 정한 양식과 규준을 유지하며 이상향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인들은 보다 실제에 가깝고 생생한 묘사를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스 미술은 양식 변화에 따라 그 시기가 크게 넷으로 나뉘어 설명됩니다. 우선 첫 번째 단계는 기원전 1,000년 말부터 700년경까지로 기하학적 시기(Geometric period)라고 불립니다. 기원전 620년부터 페르시아 전쟁이 종결된 이듬해인 480년까지는 아르카익 시기(Archaic period)라고 불리며, 미술은 물론 사회, 정치,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최전성기를 이룬 기원전 480년부터 323년까지를 고전기(Classical period)라고 부르죠. 그리고 마지막 기원전 323년부터 146년까지의 시기, 즉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에 이어진 그리스 미술의 확대 및 변화기를 헬레니즘 시기(Hellenistic period)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 미술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기하학적 시기는 이전 시기에 번성했던 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문양과 패턴이 강조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 더 구체적이며 세밀한 묘사가 이뤄졌죠. 이 당시 미술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도기화입니다. 도기화는 말 그대로 도기에 그려진 그림을 말해요. 당시에는 생활용 도기부터 제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기에 그림이 그려졌어요. 일상적인 풍경부터 신화와 영웅담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내용도 도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했죠.


아르카익 시기는 이전 시기와 비교해 보다 다양한 기법이 개발된 것이 특징입니다. 형상에 유약을 발라 구워 검은색으로 표현한 흑화식 기법과 형상 대신 배경을 검은색으로 표현한 적화식 기법이 대표적이죠. 주로 이 시기에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폴리스들이 생겨났으며, 이집트에서 전수받은 기술로 만든 거대한 대리석 입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미술의 정수, 고전기를 향한 준비가 차근차근 이뤄졌던 거죠.


고전기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고전 서양 미술의 근간이 된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미론(Myron, BC 480?-BC 440?)의 ‘원반 던지는 사람’,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 BC ?-BC ?)의 ‘창을 들고 가는 사람’ 등이 모두 고전기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미론, <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450년경


건물은 완벽한 비례와 이상적인 미를 갖추었으며, 조각상은 인체의 역동적이며 유기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죠.


마지막 헬레니즘 시기에는 보다 자유롭고 대담한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전 이후, 동서양 사이에 활발한 상호 교류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죠. 기원전 150년경 멘데레스 강 유역 안티오키아의 한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밀로의 비너스’,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203년 로도스 사람들이 세운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작자미상, <사모트라케의 니케>, 기원전 190년경


이후 그리스 지역은 로마 제국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우리가 고대 그리스 문화를 만나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어요. 바로 로마 제국이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그리스의 많은 예술가들이 로마에서 활동했고, 수많은 수집가들이 그리스 거장의 작품을 사들였어요. 본래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리스의 조각상을 대리석으로 복제하는 작업도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기존의 청동 조각상은 후대인들이 녹여 무기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조각상을 복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의 예술 작품을 몇 점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거예요.) 결국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로마인들은 현대와 고대 그리스 미술을 연결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죠.


신간 <세상 인문학적인 미술사>에 담긴 내용을 일부 편집하여 업로드한 내용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이전 02화 사랑이거나, 사냥이거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