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산업혁명에서 시작되었다
신간 <세상 인문학적인 미술사>에 담긴 내용을 일부 편집하여 업로드한 내용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18세기 후반부터 거의 한 세기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세상을 송두리째 뒤바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난 거예요. 산업혁명은 좁은 의미로는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기술혁신과 기계 및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공장제 공업의 도입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회, 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이루어졌어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왕과 귀족 계급이 무너졌고, 그 빈자리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시민 계급이 차지하게 되었죠. 산업혁명은 또한 넓은 의미로는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전환을 뜻하기도 합니다. 토지 생산물의 획득을 위해 인구 중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해야 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에서는 넘쳐나는 노동력과 빠른 생산력을 자랑하는 기계장치를 이용해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죠.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속도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그에 발맞춰 인구도 빠르게 늘어났고요.
산업혁명이 늘려놓은 것은 제품의 생산량이나 인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증기선과 기차 등이 발명됨으로써 더 멀리, 더 빠르게 갈 길이 열렸기 때문이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이국적이며 낯선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죠. 당연히 새로운 환경과 마주한 사람들의 머릿속은 그 새로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영향을 받을 만한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어요. 무역선들이 전 세계 곳곳을 방문해 이국적인 상품과 낯선 이야기를 유럽으로 부지런히 실어 날랐기 때문이죠. 가령 우리가 이번에 살펴볼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에서 건너온 채색 목판화였습니다. 채색 목판화는 유럽으로 수출될 은이나 값비싼 도자기를 감싸는 포장지에 불과했지만, 정작 유럽으로 건너와서는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화려한 색채와 동양화 특유의 파격적인 생략법이 기존의 전통적인 회화에 대해 염증을 느끼던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거죠.
새로운 기술의 등장도 변화를 촉발했습니다. 바로 19세기 초 광학 및 화학 분야의 발전으로 탄생한 ‘사진’ 기술이 그 주인공이었죠.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 1765-1833)는 1826년 세계 최초로 사진 촬영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에 태양 광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8시간이나 되는 노출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직 예술이 되기엔 멀고도 험한 길이 남아 있었던 거죠.
그러나 이후 사진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니에프스의 동료이자 화가, 발명가였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 1787-1851)는 1837년 필요 노출시간이 약 20분에 불과한 다게레오 타입(Dagrerreo Types) 카메라를 발명했으며, 곧이어 1839년에는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1877)이 네거티브 필름과 인화지를 사용한 촬영에 성공했죠. 나아가 1850년경에는 사진 촬영을 위한 노출시간이 수초로 줄어들었고, 1858년에는 즉석 사진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는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새로운 부상한 시민 계급의 기준과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체되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예술가들도 치열하고 부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치열함의 결과물인 ‘인상주의’는 어떤 특징을 가진 미술이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 ‘인상’ 한 번 확실하네!
쿠르베의 개인전이 열린 지 8년이 지난 1863년, 사실주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등장합니다. 이 해는 ‘낙선자 살롱전’이 열렸어요. 낙선자 살롱전이란 살롱전에 떨어진 작품을 따로 모아 대중에게 공개한 전시회를 말합니다. 이는 역사, 신화 등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만을 가치 있게 평가한 살롱전 심사 기준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열리게 된 행사였는데요. 이 전시회에 사실주의 작품과 함께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이 대거 전시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이때 전시된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나체의 여성은 이전 시대의 누드화와 달리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관객을 직접 응시하는 것 같은 시선도 작품성보다는 외설에 더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무명 예술가 협회’라는 그룹을 만들고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낙선자 살롱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진보적인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요. 신문기자였던 루이 르루와(Louis Leroy)는 이 전시회를 찾아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 해돋이>를 본 뒤 ‘인상만큼은 확실하지만 유치한 벽지만도 못하다’며 야유 섞인 비평을 내놓았죠.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이들의 그림은 평생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원근법과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 대조법 같은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유산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색채와 빛을 통해 짧은 순간에 포착된 대상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죠. 그런데 대체 이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이는 앞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실험을 통해 빛이 하나의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색이 섞인 일종의 ‘혼합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어요.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관습적인 기준에 따라 그림을 그리기보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와 인상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죠.
그럼 이제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만나보죠. 첫 번째 인물인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흔히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입니다. 그는 사실 인상주의 혁명의 선구자가 될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정통에 가까운 화가 수업을 받았으며, 그 또한 평생 공식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죠.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대한 비난도 마네의 입장에선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네 생각에는 이 그림이야말로 보수적 비평가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전통과 관습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이었어요.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 <파리스의 심판> 중 한 부분을 따라 그리되, 이를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완성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인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와 비교되기도 했는데요. 이는 두 그림 모두 옷을 입은 남자와 옷을 벗은 여자가 야외에서 뒤섞여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 그림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탓에 결국 소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대관절 우리 파리지앵이 알몸으로 밖에 나와 있다니!’ 말이죠.
그럼에 불구하고, 마네는 더욱 과감해졌습니다. 2년 뒤인 1865년, 또 다른 문제작 <올랭피아>를 전시한 거죠. 평론가들은 그를 마구 비난했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음란한 그림이라며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델로 한 그림이자, 매춘부를 그린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선 거죠. 훗날 인상주의자라고 불리게 될 젊은 화가들도 마네를 추앙했어요. 그를 이전 세대의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법을 추구하는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두 번째 화가는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인상파라는 명칭을 얻게 만든 장본인이죠. 우스갯소리로 인상주의의 두 대표화가 이름을 따서 마네모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두 사람의 그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름마저 비슷하죠. 실제로 마네는 모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과 이름을 헛갈릴 수도 있지 않겠냐면서요. 물론 이후 두 사람이 만난 뒤부터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말이죠.
모네는 청소년기에 상업 화가이가 풍자 만화가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그린 그림은 10~20프랑 정도에 팔렸는데요.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셈입니다. 이후 그는 외젠 부댕(Eugène Boudin,1824-1898)이라는 화가를 만나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0대의 모네에게 ‘야외로 나가서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했다고 해요. 그리고 ‘물에 비치는 빛의 움직임과 밝은 색조에 집중하라’고 조언했죠. 모네는 훗날 부댕과 함께 그림을 그렸던 순간에 대해 “화가로서 내 운명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이제 진정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외젠 부댕 덕분”이라고 그를 추켜세웠죠.
모네는 아카데미에 들어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스위스 출신 예술가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가 운영하는 아틀리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1841-187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등과 함께 인상주의 양식을 만들어 내었죠. 한때 그들은 곤궁함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모네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였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으면서 자연스레 부와 명성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많은 화가들이 인상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화풍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네만큼은 끝까지 ‘빛은 곧 색채’라는 자신의 인상주의 원칙을 고수했죠. 특히 말년인 1890년대 이후부터 모네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꾸준히 그려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건초 더미를 그렸습니다. 약 1년에 걸쳐 25점이 넘는 건초 그림이 그려졌죠. 다음해에는 강변에 줄지어 선 포플러 나무가 소재가 되었고, 뒤이어 대성당, 수련 등이 작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같은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연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알려집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같은 장면을 그린 것임에도 그린 날짜와 시간, 날씨 등에 따라 다른 그림들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어쩌면 그는 폴 세잔의 말처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소개할 화가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Renoir)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무늬를 그려 넣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적성에 맞았던 모양입니다. 이내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결국 조금씩 모은 돈을 가지고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되었죠. 이곳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훗날 인상파 운동을 이끈 젊은 화가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고요.
르누아르의 그림이 가진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뛰어난 색채감입니다. 특히 1876년에 그려진 그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마치 ‘지상을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이 묘사한 듯’ 파리 중심부 몽마르트에 위치한 야외 댄스홀에서 펼쳐진 일상의 유쾌하고 즐거운 순간이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죠.
그러던 중 그는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본 뒤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죠. 그의 화풍도 이를 계기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대의 생활상이 아닌 고전적 포즈의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담백한 색조와 선명한 윤곽선을 바탕으로 하는 화면 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독자적이며 풍부한 색채 표현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죠.
르누아르는 죽는 날까지 예술 혼을 불태웠다고 알려집니다. 만년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인해 손이 마비되기도 했는데요. 붓을 손목에 묶어 끝내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완성시켰다고 하죠. 따로 조수를 두고 조각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르누아르를 담당한 어느 화상은 ‘그가 말년에 극심한 통증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예전과 다름없이 행복해 보였다’며 마지막을 회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