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신간 <세상 인문학적인 미술사>에 담긴 내용을 일부 편집하여 업로드한 내용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1914년 7월 28일, 인류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거죠. 이전에도 (최소한 겪은 사람의 입장에선) ‘대전’이라 불릴만한 전쟁은 많았지만, 이 전쟁은 규모나 양상 면에서 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사망자 수는 최대 2,500만 명에 달했고, 2,1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부상당했죠. 이전까지 서구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언급되는 30년 전쟁의 경우에도 총 사망자 수가 750만 명 정도였으니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죠.
경제적인 피해도 컸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나라가 경제 위기에 허덕였어요.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사용했고, 또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빚을 진 탓이었죠.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이 인플레이션에 허덕였어요. 1923년을 기준으로 영국의 물가 상승률이 159%에 달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이보다 훨씬 높은 411%, 582%를 기록했죠. 물론 이보다 더한 나라도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이었어요. 76만 5,000%라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을 기록한 거죠. 말 그대로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 같은 피해가 일어난 데에는 이른바 총력전(total war)이 펼쳐진 탓이 컸습니다. 동원된 인적, 물적 자원의 규모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거든요. 군인들은 매일 같이 전선으로 투입돼 피를 흘렸고, 이른바 비전투원들도 ‘후방전선’에 투입되어 이 대규모 전쟁에 힘을 보탰어요. 특히 수많은 여성들이 산업 각 분야에 배치되었습니다. 영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쟁 기간 동안 94만 명에 달하는 여성이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되었고, 23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농업 부문에 종사했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새로 창설된 부대에서 제한적이나마 군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죠.
지옥 같은 전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2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거죠.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인들의 반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이 된 승전국들은 패전국 독일에 베르사유 조약을 강요했습니다. 명분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감내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약의 내용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무장해제는 물론, 엄청난 수준의 전쟁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던 거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이러한 독일 국민의 반감을 등에 없고 1933년 투표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빠르게 다음 전쟁을 향해 나아갔어요. 그 해에 바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2년 뒤인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한 채 공군과 징병제를 부활시켰죠. 그리고 마침내 1939년 9월 1일,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죠.
두 번째 세계대전의 결과는 더욱 끔찍했습니다. 사망자만해도 최대 7,300만 명(공식 집계상으로는 약 5,600만 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누락된 내용이 많은 것으로 추정)에 달할 정도였죠. 심지어 민간인 피해도 컸어요. 특히 유대인들은 나치가 펼친 절멸 정책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사망했을 정도죠.
세계대전이 안긴 피해는 인명과 물질 측면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 난 뒤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빠졌어요. 오랜 기간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졌기 때문이죠. 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인 ‘이성’을 활용해 자신들이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성은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들어냈고, 자유와 평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적극 활용되었던 거죠.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이성을 믿으면 안 된다고 외쳤고,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한 번 이성에 기회를 줘야 한다고 그들을 설득했죠.
미술도 이러한 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몸소 체험하고 있는 혼란을 이해하려 애썼어요. 그리고 자신들이 이해한 내용 혹은 혼란 그 자체를 작품 안에 녹여내고자 했죠.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냐고요? 지금부터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죠.
혼란 속에서 피어난 ‘완전히’ 새로운 미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 미술은 도시화와 산업화, 세속화 되어가는 서구사회의 변화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가들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과 마주했어요. 그리고 새로운 미술 양식을 시도하며 기존의 가치에 도전했죠. 다양한 미술 사조가 빠르게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당연히 제1, 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하고 비트는 기폭제가 되었고요. 다다이즘(Dadaism)은 그 기폭제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미술 사조였습니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과 광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인 이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권위와 불합리에 저항하고자 애쓴 사람들이기도 했죠.
다다라는 말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일종의 ‘사전 기원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다라는 이름은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라는 카페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알려집니다. 당시 이곳에서는 예술가들의 모임이 자주 열렸는데요. 어느 날 이곳에 모인 화가들이 사전을 들고 와 무작위로 펼쳤고, 그 장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인 다다를 자신들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하죠. 참고로 다다는 프랑스어로 어린 아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인데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단어가 다다이즘의 본질인 무의미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를 채택했다고 합니다. (다른 설로는 루마니어로 ‘예’라는 단어를 반복한 음절이라는 설, 어린아이의 옹알이를 따온 것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확인된 바는 없지만, 이처럼 무의미한 단어로 자신들을 설명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다다이스트들의 반항적인 예술관을 잘 보여줍니다.)
어찌됐든 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국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전쟁 중이던 타 국가들과 달리 반정부주의적 예술가를 향한 박해가 적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 많은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자신의 미술과 창작품을 보여주는 ‘거리 예술’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의 활동 중에는 시인 여러 명이 모여 마구잡이로 시구를 읊조리거나 개처럼 짖어대는 등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는 실제로는 기존의 정형화된 미적 관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죠.
다다이즘은 7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스위스를 넘어 유럽, 미국에 이르는 전 세계적 사조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다다이즘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은 다다이즘의 창시자로 알려진 후고 발(Hugo Ball, 1886-1927)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이라는 예술가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라 불리는 새로운 미술 형태를 개발함으로써 현대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레디메이드는 원래 ‘기성품’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뒤샹은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어요. 소변기나 술병걸이, 자전거 바퀴 등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제품’을 예술품이라 부르며 미술관에 전시한 거죠. 뒤샹은 비록 기성품이라도 예술가가 선택해 관람객에게 제시하는 과정을 거치면 그 제품의 기존 용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이는 예술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기존 미술의 의미가 이제는 무언가를 ‘정의하는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죠. 이제 손재주가 좋아야만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다다이즘에 뒤이어 생겨난 초현실주의 미술도 기존 예술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주로 구체적인 형상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간 당대 여러 미술 사조와 달리, 작품 속에 사람과 풍경 등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죠. 물론 익숙한 모습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들의 작품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고 여기며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죠. 무의식은 기존 서구 세계가 믿어온 이성과 합리의 반대 지점에 서 있는 영역입니다. 다시 말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전복이 미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났던 것이죠.
그렇다면 초현실주의자들은 어떻게 미술이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을까요? 이들이 처음으로 시도한 방법은 오토마티즘(automatisme)이었습니다. 자동기술법이라 번역되는 기법으로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방식을 말하죠. 오토마티즘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미술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이 고안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신경정신과 군의관으로 일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마치 노이로제 환자들이 뱉어내는 독백처럼 의식의 흐름을 최대한 빠르게 받아 적는 방식을 고안했죠. 이를 통해 그는 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시와 그림이야말로 진실의 과정이 기록될 수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익숙한 일상의 이미지를 불러와 낯설게 만드는 것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가 대표적인데요. 그는 이른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활용해 아주 '의도적인'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데페이즈망은 본래 ‘위치를 바꾸다’라는 뜻인데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대상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질적인 환경에 옮겨둠으로써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기법을 말하죠. 이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지와 대상, 언어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회화 자체는 물론, 인간의 인식에 대한 총체적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창조함으로써 자신들의 혼란을 표현하고 그 대안을 찾고자 한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