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3)
"마음과 지능,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그만두고, 일단 이 시험을 통과하는 모든 것은 확실히 '지적이다'라고 합의한 뒤, 이 시험을 통과하는 기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로 논의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훨씬 발전적이지 않은가?” (앨런 튜링)
그렇다면 인류의 네 번째 혁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을까? AI의 역사는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과학의 아버지이자 현대 컴퓨터과학의 개념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 받는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쓴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Com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이 그 시작이었다. 그는 ‘기계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튜링 테스트(The Turing Test)’를 제안했다. 튜링 테스트란 기계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방법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응답자 둘 중 어느 쪽이 사람인지 모르게 한 상태에서 동일한 질문에 응답하도록 하고, 질문자가 답변만 본 뒤 그중 어느 것이 사람 혹은 기계인지 식별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만약 질문자가 기계의 답변과 인간의 답변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 기계는 지적 존재로 간주된다. 앨런 튜링은 지적인 기계의 개념을 생각해낸 것은 물론, 그 평가 방법까지 최초로 제시했던 것이다.
AI 기술 발전의 본격적인 시작은 1956년이었다. 미국 다트머스 대학 존 매카시(John McCarthy) 교수의 주도로 인공지능의 개념을 세상에 알린 다트머스 회의(Dartmouth Conference)가 열린 것이다.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나다니엘 로체스터(Nathaniel Rocheste) 등 총 10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이 회의에서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처럼 학습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그리고 지능을 가진 기계를 통칭하는 단어로 AI, 즉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연구자들은 AI 시대가 빠르게 도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회의가 열리고 2년 뒤인 1958년 허버트 사이먼과 앨런 뉴얼은 “10년 내로 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약 10년 뒤인 1965년에는 “20년 안에 기계가 모든 인간이 하는 일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참석자였던 마빈 민스키 역시 “이번 세기 안에 인공지능을 만드는 문제가 거의 해결될 것”이라며 기술의 빠른 발전 가능성을 낙관했다.
현실은 달랐다. 약속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간에게 쉬운 글자 읽기나 그림 인식 같은 기능조차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성능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인간, 즉 연구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성능을 보여줄 기계장치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구자들의 호언장담과 달리 성과가 빠르게 나오지 않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AI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에 발맞춰 투자도 함께 줄어들었다. AI의 첫 번째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AI 연구는 1980년대에 부활했다. 산업계에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 도입되며 다시금 확산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전문가 시스템이란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입력한 규칙을 기반으로 자동 판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말한다. 의학, 법률, 유통 등 여러 분야에서 이 시스템이 사용되었고, 일시적으로 AI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 시스템도 곧 한계를 노출했다. 시스템을 유지, 발전시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이다. 주로 사람이 설정한 규칙에만 의존하여 동작하기에 규칙 또는 데이터 베이스 외의 내용은 해결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한계 때문이었다. 결국 투자 대비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으며 AI에 대한 관심은 다시 한 번 사그라든다. 두 번째 AI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AI의 세 번째 부흥기는 1990년대 후반에 찾아왔다. 새로운 부흥기가 도래한 데에는 외부적인 요인의 영향이 컸다. 컴퓨터 시스템의 발전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이전에는 상상만 했을 뿐, 실현하지는 못했던 AI 기술의 개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스스로 규칙을 찾아 학습하는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알고리즘이다. 온라인에서 수집한 대량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AI는 스스로 규칙을 찾아 학습하는 것은 물론 사람이 찾지 못하는 규칙까지 찾아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람이 직접 입력한 규칙 혹은 데이터만을 활용하던 이전 세대의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AI 기술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의 딥 러닝(Deep Learnning) 연구 성과가 주목 받으며 재도약한다. 딥러닝이란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네트워크(neural networks) 구조로 데이터를 처리하도록 컴퓨터를 가르치는 인공지능 방식을 말한다. 학습 데이터를 알려주고 데이터 특징을 추출하는 등 사람의 개입이 일부 포함되는 머신러닝과 달리,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어도 컴퓨터가 심층 신경망을 활용해 스스로 학습하는 것이 특징이다.
딥러닝 기술이 빠르게 성장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GPU를 비롯한 컴퓨터 시스템의 발전이다. 그래픽 처리 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를 뜻하는 GPU는 원래 게임 속 3D 이미지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명령어를 하나씩 순서대로 처리하는 CPU, 즉 중앙처리장치(Central Processing Unit)와 달리 한 번에 여러 계산을 할 수 있어 복잡한 AI 훈련과 서비스에 적합한 것이 특징이다. GPU 개발의 선두주자격인 엔비디아가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시가총액 1, 2위를 다투며 빠르게 성장한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두 번째는 데이터(Data)의 증가다. 인공 신경망 기반의 AI를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부터 가공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과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2000년대 후반부터는 스마트폰과 사물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며 빅데이터(Big Data)의 개념이 등장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딥러닝 알고리즘은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더욱 더 정교하게 구축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16년 3월, 딥러닝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벤트가 한국에서 열렸다. 바로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이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이세돌 9단을 4대 1로 꺾으며 AI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인간을 꺾은’ AI의 탄생을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2022년 11월, 관심사를 잠시 떠나 있던 AI가 다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번장의 서두에 언급한 챗GPT(ChatGPT)가 출시된 것이다. 오픈AI(OpenAI)가 만든 이 서비스는 LLM, 즉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을 바탕으로 한다. LLM이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통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자연어 처리 작업을 수행하는 딥러닝 알고리즘을 뜻한다. 나아가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이다. 즉, 머신러닝을 통해 방대한 데이터를 ‘미리 학습(Pre-trained)’하여 이를 문장 형태로 ‘생성(Generative)’하는 AI가 바로 이 챗GPT인 것이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Generative AI)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 또는 분류하는 데 그쳤던 딥러닝의 수준을 넘어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포맷의 수준 높은 콘텐츠를 생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4년 이안 굿펠로우(Ian Goodfellow)가 발표한 ‘GANs(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생성적 적대 신경망)’ 모델, 2017년에 발표된 자연어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NLP) 모델 ‘트랜스포머(Transformer)’ 등을 바탕으로 개발, 발전되어 오고 있다.
챗GPT는 출시 일주일만에 사용자 수 100만 명을 넘겼고, 출시 약 1년 9개월이 지난 2024년 8월에는 주간 사용자가 2억 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물론 오픈AI만 생성형 AI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네이버의 클로바 엑스(CLOVA X), 메타의 라마(LLaMA) 등 이미 수많은 기업들이 이 ‘핫한’ 시장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지난 2005년 당대 최고의 미래학자로 평가 받던 레이 커즈와일(Ray Kerzweil)의 책 한 권이 출간됐다.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커즈와일은 2029년에 범용 인공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출현하고, 2045년에는 특이점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여기서 특이점이란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모든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 출현하는 시점을 말한다.
이러한 예상을 한 것은 커즈와일 뿐만이 아니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2020년 ‘인공지능이 5년 내에 출현할 것’이라고 예견했고, 분산 인공지능(distributed AI) 개발 선두주자인 ‘유내너머스 AI’의 CEO 루이스 로젠버그(Louis Rosenberg) 또한 2030년에 특이점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MIT AI연구소장을 역임한 패트릭 윈스턴(Patrick Winston) 교수는 2040년, 스위스의 AI연구소 IDSIA 소장이자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위르겐 슈미트후버(Jürgen Schumidhuber)는 2050년 이전을 특이점 발생 시기로 보았다. 저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AI가 인류의 지성을 뛰어넘는 시기, 즉 ‘특이점이 온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네 번째 변혁은 바로 이 시기, 즉 ‘특이점’의 도래를 기점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