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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12. 제 가족은 집에 있습니다만

브런치북_다시, 제주

어느덧 제 나이 마흔일곱. 

지난날 회사에서 꼰대라며 싫어했던 당시 부장님들보다 지금의 제 나이가 더 많아진 걸 최근에서야 헤아려 보곤 그 세월의 무게에 아연해졌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당연히 회사에선 고위직으로, 자영업을 하면 안정적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꺼라 생각했던 젊은날과는 달리 이 나이에도 저는 여전히 쳇바퀴 돌리듯 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제 알바는 그만두고 정규직으로 취업해보자며 공고를 찾아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골프장에서 연락이 왔고 취업이 되었습니다. 

제주의 골프장은 이 코로나 시국에도 성업 중이었고 회사의 규모로도 안정적일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클럽하우스 찬모로 입사한 첫날부터 기존 멤버들의 텃세에 저는 완전 기가 눌려 버렸습니다. 정식 요리수업을 받은적 없는 저의 경력을 비웃듯 어디 호텔 출신인지부터 물어보는 그들에게 단기간의 알바경험을 나열하는 것도 구차했는데 결정적 사건은 이튿날에 벌어졌습니다. 점심시간전 다함께 간식을 먹고 난후 점심식사는 건너뛰고 일하고 있던 오후, 저는 같은 팀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은지 5분도 안됐을때 주방장이 오더니 눈을 매섭게 뜨며 말했습니다.

"지금 다들 일하는거 안 보이세요? 혼자만 힘들어요?"

처음엔 멋적게 웃으며 지금 조금 한가해져서 5분만 쉬는 거다 얘기했지만 그는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일만 다하면 끝입니까? 같은 주방에서 이쪽 일하는 거 안 보여요? 팀장인 나한테 얘기는 했습니까?"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제가 볼때 그 골프장은 그리 바쁜 곳도 아니었고 호텔이나 일반 식당에 비하면 정말 일의 강도는 약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텝들은 바쁘다, 힘들다 입에 달고 있었고 제 눈에는 빨리 처리해도 될 일들을 오히려 질질 끌며 오래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쨌든 일류호텔 출신이라는 그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에 발맞추려 이참에 저도 제대로 된 요리교육을 받는셈치고 효율성을 따지기보단 퀄리티를 지키자는 각오를 했지만 그 순간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팀장님, 지금이 그렇게 바쁜 시간이예요? 거기 메뉴 몇개 나가요? 두 분이서 하기 벅찰만큼 많은가요? 그렇게 바쁜데 제가 외면했다면 그건 제가 정말 잘못한 거겠죠. 그런데 솔직히 지금 그렇게 바쁘세요?"

"바쁜지 안 바쁜지는 주방장인 제가 판단합니다. 그리고 찬모쪽 일도 이 주방에 속해 있습니다. 제 지시를 따르지 않을거면 팀장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같은 주방에서 가족처럼 일해야지 내 일만 합니까?"

"정말 바쁜 상황이었으면 당연히 도왔어요. 이게 저까지 매달릴 바쁜 상황이라고 저는 생각지 않았을 뿐이구요. 노동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지금까지 최소한 30분의 휴식시간은 주어져야 정상이예요. 저는 동료의 양해를 구하고 이제 앉은지 5분 되었구요. 그리고 자꾸 가족 가족 하시는데 왜 우리가 가족입니까? 제 가족은 집에 있는데요. 가족이 아닌데 어떻게 가족이 됩니까?"

저보다 열살은 어렸던 주방장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결국은 팀장인 제 말을 못 따르겠다 그거군요. 그럼 본부장님 불러서 물어봅시다.  팀장 말이 말 같지 않다니 본부장님 불러서 지금 이 상황이 제대로 된 건가 따져보자구요."

불려온 본부장은 난감해하며 얘기를 듣기보다는 서로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지내면 좋겠다, 양쪽 모두 다 틀린 말은 없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이해하고 도와야한다 등등 읍소 아닌 읍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이 상황도 어이없는데, 친구와 싸우고 쪼르르 엄마 불러 이르는 듯한 주방장의 유치한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일인가 회의감이 몰려왔기에 그냥 제가 그만두겠다 했습니다. 애초에 저를 뽑았던 이사는 마침 육지에 가 있던 참이라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는 기존 인력들 다 갈아치운다며 난리였지만 어쨌든 전 조직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도 조직생활은 힘들었는데 이곳, 제주에서의 조직생활은 더더욱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육체 노동은 무리다' 

몸도 힘들고 일하는 사람들과의 마음도 힘들었습니다. 다시 사무직으로 눈길을 돌려 예전 했던 업무와 비슷한 일을 하는 한 정부기관 업체에 지원을 했습니다. 따져보면 최저알바 시급밖에 안 되는 정말 박봉이었지만, 그래도 안정적으로 일할수 있다면 오랜만에 9 to 6의 시스템 속에서 비록 모든 근무자가 여자들 뿐이라 해도 기꺼이 일해내리라 다짐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들어선 사무실에서 바삐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니 다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정규대졸 초봉에도 못 미치는 박봉의 급여를 이 나이에 받으며 다시 층층시하 조직생활에 눈치보는 일이 까마득해 보였습니다. 그런게 싫어 회사를 나왔고 내 사업을 해보겠다며 고군분투했던 지난 10년의 시간들이 어찌보면 마냥 힘들기만 한 시간들은 아니었구나도 싶었습니다. 한때 면접의 달인으로까지 불리며 왠만한 면접에선 떨어진 적이 없던 저도 이번 2:1의 50% 확률의 게임에서조차 보기좋게 낙방의 결과를 받고 보니 이 바닥은 이제 제겐 끝이구나 마음을 접었습니다. 


미련을 버리고 제가 주력으로 하고 있는 유통업을 어쨌든 유지하려 애쓰면서 비수기엔 펜션 청소일도 했습니다. 어차피 제주에선 한가지 직업만으론 살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리고 저는 경단녀이고 영세 자영업자이며 이곳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닌, 나이 사십 넘어 이민 온 낯선 지역임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한해 한해가 연장선상이라기보다는 또 다시 맨땅 위에서 시작하는 '언제나 리셋인생'이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걸 받아들이기로 하니 예전처럼 울분과 원망, 스트레스로 점철된 일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여 있는 곳이 없으니 마음은 가볍고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걱정이 없고, 쌓인 관계가 없으니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고, 그럼에도 이 멋진 제주의 하늘과 바다와 꽃들과 초원이 공짜이니 괜찮습니다.

지난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영화 아저씨를 다시 봤습니다. 지금 보니 좀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원빈의 이 대사는 저에게 참 와 닿았습니다.

"너희들은 내일만 살지? 난 오늘만 산다. 내일만 사는 놈들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언젠가부터 전 오늘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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