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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13. 전 발표하러 왔는데요.

브런치북_다시, 제주

제주에서 자영업을 시작하고 몇해가 지났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내려와 첫 해에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무대뽀로 들이댔지만, 다음 해가 되니 이것저것 갖춰야할 것들이 보였습니다. 시중에 파는 일반박스보단 좀더 정체성 있게 자체박스도 제작하고 싶었고 매입한 농산물을 보관할 물류창고도 또 그 창고를 꾸며줄 이런저런 장치들도 아쉬웠습니다. 좀더 근사하게 가꿔서 좀더 많은 곳에 알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자본의 문제였기에 그 한계를 극복할 방법으로 정부지원 사업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제주에서 지원되는 사업은 이미 마감된 프로젝트가 상당수였고 진행중인 사업도 마감이 코앞이었는데 마침 제게 해당되는 사업이 있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회사 생활한지도 오래되어 보고서 작성하는 일도 낯선데 신청서를 채우는 일과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머릿속은 멍해지고 압박감은 밀려들고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그렇게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며 계획서 초안 잡는데만도 이주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름 심사숙고해서 마지막날 겨우 서류를 제출했고 이틀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1차 프리젠테이션이 있으니 준비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내용으로 기대없이 열어본 메일에 전 사실 내색은 안했지만 많이 흥분했습니다. 어쨌든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해볼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다음 날 온 메일에는 구체적 일정표가 첨부되어 있었고 놀랍게도 발표할 팀은 자그만치 44팀이었습니다. 이틀동안 이 팀들이 모두 발표를 하는 건데 한 팀에게 주어진 발표시간은 겨우 5분, 질의응답시간 10분까지 해서 총 15분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제가 그 마흔네팀 중 첫번째 발표자로 참가팀들의 명단을 보니 쟁쟁한 회사들이 상당수였습니다. 솔직히 명단만으로 전 많이 쫄았습니다. 발표자리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습니다. 가서 괜히 무시만 당하는 게 아닐까, 저라는 사람 자체가 제주도에서 인지도도 없고 개인 사업자에 업력도 짧아 뭐 하나 딱히 내세울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틀정도 고민하다 그냥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쨌든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예전 기업교육 업계에서 근무했을 때 이런저런 프리젠테이션 경험이 많았는데 너무 준비를 많이 하면 오히려 로봇처럼 딱딱해져서 망쳤던 경험이 있었기에 사실 별로 준비는 안했습니다. 어쨌든 사업 계획서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성한 것이니 내용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고, 시간도 한정적이이었기에 키워드만 전달하면 될것  같았습니다. 당일 아침 발표장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혼자 입을 떼 보니 5분이란 시간이 엄청 짧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결국 준비한 페이퍼는 다 구겨버리고 그냥 옆집 사람에게 재밌는 사업 얘기하듯이 하기로 했습니다. 



발표장에 도착하니 담당자들이 너무도 친절하게 맞아줍니다. 이런 환대가 또 없을 정도로 서너명의 정장입은 담당자들이 줄을 서서 제게 명함을 주며 인사까지 합니다. 친히 안내해 준 자리에는 노트북이 셋팅되어 있고 필기도구까지 정갈히 갖춰져 있으며 가죽으로 된 의자를 빼주기까지 합니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기분이 좋아진 전 뜨거운 아메리카노까지 정중하게 주문합니다. 발표연단에 펼쳐진 프로젝터 스크린엔 이미 첫번째 발표자인 제가 보낸 PT자료가 떠 있었습니다.

'아, 요즘 공무원들은 정말 친절하구나. 이 많은 발표자들에게 이런 과분한 친절을 다 베푸는 건가? 대단하네.' 

팀장이란 분이 와서 또 한껏 미소를 장착한채 말합니다.

"일찍 오셨네요. 기다리시는 동안 밖에 구경도 좀 하세요. 여기 경관이 정말 좋아요. 오늘 날씨도 좋아 한라산도 다 보입니다."

입고 온 정장과 구두 신은 발에 한껏 힘을 주며 일어나 통창으로 된 밖을 바라보니 정말 눈이 부십니다. 제주에선 흔치 않은 고층 빌딩이라 저 밑으로 제주시내가 다 내려다보이고, 눈부실만큼 청명한 날이라 그야말로 한라산의 백록담까지 선명합니다. 제주에 사는 저로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입니다. 

'역시, 좋은 자리는 다 공무원들이 차지하고 있구만.' 

예쁜 미소를 장착한 젊은 여직원이 결제서류를 들고와 싸인을 해달랍니다. 서류를 보니 소속을 적고 싸인을 하게 되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제 이름은 없습니다.

"여기 그냥 제 이름 적고 싸인하면 돼요?"

"네. 적고 싸인해주시면 됩니다."

굳이 없는 제 이름과 소속을 싸인펜으로 하단에 적고 싸인까지 마칩니다. 그리고 가져온 USB를 가방에서 꺼내들며 말했습니다. 

"미리 보내드렸어야 했는데 참조자료를 좀 가져와봤어요. 필요할지 몰라 그런데 발표시간에 이걸 쓸수 있을까요?"

순간 좀전까지 방긋방긋 웃던 여직원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무슨 발표..요?"

"아, 어제까지만 가능했던 건가요? 뭐 시간이 짧아 안쓸 수도 있긴 한데 혹시나 해서요. 참조자료예요."

"..."

저쪽에 있던 팀장이 급하게 다가옵니다. 

"발표자세요?"

"네. 저기 저 회사 대표인데요."

저는 화면에 떠 있는 자료 첫장의 프로젝트명과 회사이름을 가리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좀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전까지 화려하게 빛났던 저는 초라하게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주었던 명함을 다시 싹 수거해갔고,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된다며 저를 발표장 밖으로 나가달라 했습니다. 애초부터 제가 들어가겠다 한건 아니었지만 쫓겨나듯 허둥지둥 나오는 모습도 자존심이 허락질 않아 또각또각 발소리를 울리며 걸어나오니 제 뒤로 철커덕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그날따라 정장을 입고 간 면접관처럼 보였던 제게 책임이 있다면 있었겠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제가 심사위원인줄 알았던 겁니다. 어쨌든 기분 참 뭐 같았지만 발표는 해야하니 웃음을 장착한 채 준비한 얘기를 했습니다. 5분이란 시간은 정말이지 너무도 짧았습니다. 미리 보낸 자료만 파워포인트로 22장이었는데 말이죠. 발표때 보니 제가 처음 안내받았던 자리에 앉아 저를 평가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저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이해가 됐습니다. 그냥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저들과 제가 자리를 바꾸어 앉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어요. 44팀에 5분 스피치라니 꽤나 형식적인 절차에 들러리가 된 것 같았지만 서류에서 이미 다 걸러졌다면 저같은 이에겐 발표기회도 없었겠지요. 그때만 해도 저의 사업계획서가 세상에 없는 아이템인 것만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낸 사업 아이템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고 강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레퍼런스도 부족했습니다. 조금 무모한 도전이긴 했지만 나름으로는 오랜만에 차분히 책상에 앉아 계획서도 구상해보고 PPT도 만들어보고, 게다가 제가 언제 또 까만 정장에 구두 신고 공무원들 앞에서 발표해 보겠냐구요. 좀더 단련된 기업의 책임자로 다시 발표 자리에 설 날을 기약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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