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14
비가 많이 왔어요. 만난 날에도, 오늘 짐이 들어올 때도.
아이는 지금 그림 그리고 있어요. 엄마를 만나고 들어온 날은 아이도 좀 우울해 보였어요. 종달새마냥 떠들던 아이가 말이 없고 혼자 있으려 하더군요. 난 그래요. 아이한테 엄마 기억을 지우기보다는 당당하고 자랑스런 엄마로 기억되는 것이 사춘기가 되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리한 아이라 엄마와 고모가 만나는 걸 보더니 지금 와선 엄마한테 편지쓰는 거냐고 물어보네요. "엄마 보고싶어."라고 써 달래요. 슬퍼하지도 서러워하지도 말아요. 그저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요. 살면서 굴곡이 있겠지만 이겨내고 극복하면 돼요. 물론 아이엄마는 잘하리라 믿어요. 아이 염려 조금만 해요. J
힘들때마다 그랬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하나에 큰 덩어리로 뭉쳐서 크게 바라보고 멀리보고.
따지고 보면 다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인데 안 될 일이 뭐 있으랴. 울산 어머님 말처럼 '남의 자식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면 부정적인 시각은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런 거 아예 무시하고 좀 감상적일진 모르지만 내 운명이 이 아이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나 그런 생각도 해요. 아이엄마 맘 알아요. 지금 어떤 심정인지. 사실은 어떤 위로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울고 싶으면 울고 보고 싶으면 보라는 거예요. 내 딸도 그러더군요. 둘 다 미워서 보고 싶지 않다고. 내가 막 화냈어요 그건 니 맘이고 엄만 내 딸을 꼭 봐야 한다고. 둘이 껴안고 막 울었어요. 지금은 많이 편해지고 안정이 됐어요. 무엇이든 고비가 있고 혼란이 있어요. 난 피하는 쪽보다는 부딪쳐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 시기에 혼란도 갈등도 다 없어지는 것 같아요. 난 언제든지 좋아요. 보고 싶을땐 언제든지 연락해요. J
친구가 되었습니다.
7살이라는 나이차가 나는 저희 큰 언니보다도 세 살이나 더 많은 그녀와 제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남자로 인해 상처받고 딸아이와 생이별해야 하는 모진 현실 앞에 한숨과 눈물로 그리움의 밤들을 지새웠던 건 나와 그녀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아이의 친엄마 대신 돌봐주고 있는 그녀는 지금 제 딸아이를 맡아주고 있는 그 여자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인연이라 생각하면서 분명 전생에 그녀와 저, 그리고 딸아이, 전 남편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그녀와 나는 매일 이메일을 주고 받습니다. 아이 소식뿐만 아니라 지나 온 그녀의 삶도 이야기하고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힘들었던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도 합니다. 아이가 새벽에 깨어 제 엄마를 찾으며 울 때 그녀 아이를 껴안고 함께 서럽게 울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이를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 보내고 이제 여섯살된 꼬맹이를 데리고 매일 무얼 해 먹일까, 무슨 책을 읽힐까, 무슨 옷을 입힐까 고민하는 그녀는 지금 행복하다 말합니다. 천륜을 어길 순 없다며 마음 아프더라도 강하게 마음 먹고 꼬맹이 보고 싶을때 보라며크면 다 제 엄마 찾아 간다고 들었다며그때까지만 일하는 아줌마한테 맡겨 놓은 거라 그렇게 생각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메일을 보면서 눈물 짓는 '아이'라는 공통점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녀 역시 같은 아픔을 지닌 여자더군요. 아이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녀와 제가 친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두 모여 바다보고 왔습니다.
너무 기분 좋았고 도착하자마자 몸을 던진 밤 바다가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끔은 제 자신을 위해 가장 소중한 제 자신을 위해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전에 이혼하기 전, 함께 갔던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가 생각났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한창 연애하던 때의 나와 그 사람도 생각났습니다. 너무나 철없이 마냥 좋았던 그때의 우리. 아이가 태어나고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행복이라 생각했던 시간들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내가 좀 더 참았어야 했을까? 무엇이 우릴 이렇게 갈라놓았을까? 나의 문제였을까? 다시 돌아가라면 난 돌아갈 수 있을까?
이혼한 지 어느덧 1년 4개월. 그 동안 평생을 걸쳐 해도 넘칠 저주와 원망의 말들을 쏟아냈고, 제가 바라던 대로 그 사람 무일푼의 바닥까지 떨어져봤고, 저 역시도 외로움에 지쳐 그리움에 목말라 허덕이며 지내봤습니다. 지금 현재는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무일푼인 그 사람, 그 여자가 건져 올려 집 마련해주고 가게 차려 돈 벌어주며 밥 해주고 회사 다니라고 뒷바라지 해 주고 그것도 부족해 애까지 데리고 가서 키워 준다 합니다. 제가 그 상황에서 남자라 해도 그 여자에게 엄청 고마울 것 같습니다.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여자랑 살고 있는 그가 복 받은 거겠죠?
그럼, 그렇게 하지 못한 나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역시 제 문제였을까요? 다시 되돌아 보아도 지난 이삼년동안의 '어둠의 기억'외에는 저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노라 자부합니다. 정말 아끼면서 아껴주면서 이해하면서 살았다 자부했는데. 단지 인연의 문제일까요? 머릿속을 비우러 떠난 여행에서 또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고 왔나 봅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연달아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입니다. 이제 받아들이려구요. 서로가 편안해지는 법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한 길에 아프지 않게 따갑지 않게 이제는 놓아주고, 놓여나려 합니다.
시월의 마지막밤이예요.
저는 오늘도 술 한잔 걸쳤습니다. 아, 술이라도 없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아이는 잘 있습니다. 핸드폰으로 그 여자가 아이 사진도 보내주고 아이가 문자도 보내주고요. 제가 보고 싶을 땐 그 여자에게 연락하여 일산으로 가면 데리고 나와줘요. 그 여자와 친구가 된 이후로 우리 만남에 전남편의 존재는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이 데리고 놀다 저녁이 되면 근처에서 기다렸던 그 여자가 와서 아이를 태우고 가거나, 제가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재우고 보내기도 합니다. 처음 그 여자의 말대로 어쩌면 저는 제 아이를 그 여자에게 맡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만큼 그 여자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어제였던가요. 아이와 통화를 했습니다. 유치원 잘 다니고 있는지,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는지 물어보고 아이도 재잘대며 대답을 했지요. 한참 통화하고 있는데 아이 입에서 '엄마가'라는 소리가 나와요. 통화하고 있는 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지요. 그 여자를 말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아이도 이쪽도 엄마, 저쪽도 엄마라고 하려니 헷갈려 하더라구요.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서 저는 아는척 하지 않고 그냥 아이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제 마음 속에서는 시베리아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은 했었어요. 어떻게 한 집에 사는 엄마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언제까지 '고모'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참, 그게 이렇게 예고없이 들이닥칠 때는 제 마음을 저도 어찌 하기가 힘드네요. 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 속에 뻥 뚫린 허전함을 어찌할 수 없어 술을 마셨어요. 회사 동료와 거나하게 3차까지 마시고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 속 얘기를 했지요. 술취한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외쳤지요.
"그런데요. 내 딸이요.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더라구요. 글쎄. 하하하 그럼 나는 뭔가요? 하하하 그런데요. 그게 사실은 맞는거죠. 지금 엄마는 내가 아닌 그 여자가 엄마인거죠. 하하하 나는 그럼 뭘까요? 모르겠네요. 하하하 어쨌든 지금 제가 웃는 건 좋아서 웃는 거예요. 슬픈 거 같은데 아주 슬픈 거는 아니구, 기쁜 건데 그렇다고 아주 기쁜 것도 아닌, 그냥 뭐랄까. 참담한 기쁨 같은거? 하하하"
오랜만에 소식 전해요. 저에게 작은 변화가 있었어요. 잠시 한국을 떠나려 합니다.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요.
이제는 떠나도 될 것 같아서요. 아마도 지난번 아이의 그 여자를 향한 '엄마'라는 부름을 듣고난 후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가 아닌 다른 엄마가 생긴 것 같아 이제는 제가 떠나도 되겠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번주 일요일에 출국합니다. 영국에 있는 학교에 일년 등록했어요. 정말 갈 수 있을까? 나에게도 새로운 전환점이 올 수 있을까? 고민하고 두렵기도 했었는데요. 비자 나오고 스쿨레터 받고 떠날 짐까지 모두 챙겨 놓으니 이제는 정말 실감이 나네요.어젯밤에도 자꾸만 꿈에 아이가 보여 저에게 오겠다고 하는 걸 그냥 포기해야 하나, 데리고 가야하나 고민했었는데요. 꿈에서 깨고난 후에는 이제는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오늘 중으로 인터넷도 핸드폰도 모두 정지합니다. 또 한번 제 흔적을 정리한 채 저는 잠시 사라지려 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속에서 이제는 저의 상처들을 보듬고 좀 더 성숙해져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할께요. 모두들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