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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어 Nov 22. 2024

[마음관찰]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페히너는 우리 할아버지고, 프로이트는 옆집 아저씨인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내 마음은 뱃속에 있는 것 같아. 속상한 일이 있으면, 화장실에 가서 모든 걸 내려놓게 되거든. 진짜 속이 상하는 거지. (아, 미안!) 아니야. 마음은 몸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 같아. 영혼이 상할 정도의 깊은 상처에는 마음은 바깥으로 나가, 내 근처를 맴돌고 있지. 언제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 기다리면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마음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최근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상당수가 마음은 '머리'에 있다고 할 거야. 우리가 슬퍼한다는 건 뇌가 '슬픔'으로 반응하고 다른 신체 기관에 슬픔에 해당하는 반응을 하라고 명령한다고 하니깐. 근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뇌가 없으면 나라고 하는 존재를 알아볼 수도 없으니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우리 마음을 굉장히 유동적인 것으로 바라보자구. 마음은 그 가치와 별개로 크기가 작아서 우리 신체 기관을 돌아다니기도 하고(한의학에서는 폐와 슬픔을 연관시키고, 분노와 간담을 연결하곤 하지), 몸 크기만큼 커져 몸과 마음이 일대일로 조응하기도 하고, 외부로 꺼내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보낼 수도 있는 것 같아. 지금 내가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쓰고, 편지에 내 마음을 담아 너에게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라는 단어에 얽힌 논의는 다음에 더 하자구.)


신입 마음관찰자!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서양) 사람들은 몸과 마음은 다른 것으로, 각각 독립된 실체라 생각했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들어봤지? 그게 그거야. 사람들은 심신이원론을 꽤 오랫동안 받아들였어.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반대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냐. 몸과 마음에 관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몸과 마음은 구분되는 것이지만 단절되어 있다/연결되어 있다'와 '몸과 마음은 하나다'하는 심신일원론으로 나눌 수 있지. (너무 당연한 대립구도인가...) 아,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에서 마음은 'mind'야. 한국에서는 마음이라는 큰 개념으로 심리 현상을 두루두루 설명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mind/heart/sprit/soul... 세부적으로 나눴어. 예술 작품에 soul을 담을 순 있어도 mind를 담을 순 없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heart를 보내야지. 우리는 이걸 마음으로 다 표현하곤 하지. 물론, 한국에 사는 현재 우리는 서양에서 시작한 학문을 많이 공부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개념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


19세기는 심리학적으로 특별한 세기야.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철학이라는 엄마 뱃속에서 태동을 시작한 해거든. 특히 독일에서 제일 먼저 심리학이 세상으로 나왔으니깐.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살펴보면,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이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지. (안동 김 씨, 조상들 대신에 반성해.) 홍경래의 난은 사회경제적 모순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었지. 19세기의 한국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인지라, 마음이고자시고 신경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신분에 상관없이 개별적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조금씩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여. 심리학은 개별성을 뚜렷하게 인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그럼, 나는 이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았던 한 사건을 이야기해 볼까 해. 19세기 중반 어느 날, 독일의 한 남자에게 일어난 일이야.




어, 저기 병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가까이 가보자. 한 남자가 병실 침대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 눈, 내 눈!"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지만, 그의 시선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해. 그가 조금 진정된 후에 의사가 그에게 말해.


"태양광으로 인해 눈에 큰 심각한 상처가 입은 걸로 보여요. 현재는 치료를 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시력을 잃은 것에 유감을 표합니다."


의사는 그 남자가 또다시 난리를 피울까 봐 말을 하고 후딱 병실을 나가버렸어.


그래, 그는 태양 때문에 눈을 잃었던 거야. 그 사람 이름은 구스타프 페히너(Gustav Fechner)로, 물리학 교수야. 페히너는 과학자로서 관심분야가 넓었고, 그러다가 시각 잔상에 흥미를 가지게 됐어. 우리가 시각 잔상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냐면, 새벽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방에 등을 켜면, 불빛에 눈이 놀란 것처럼 아프고 눈을 감아서도 잔상이 남잖아. 아니면, 낮에 태양을 올려보다가 시선을 돌려도 태양의 잔상이 따라다니지. 그게 시각 잔상이야.


페히너는 시각 잔상을 연구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대상인 태양을 가지고 시각 잔상을 연구하기 시작했어. 페히너는 쌩 눈으로 해와 맞짱 뜬 건 아냐. 나름 태양을 쳐다보았을 때 생기는 효과를 감소시키기 위해 눈앞에 필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점점 태양을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력을 잃게 된 거지. 시력을 잃고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어. 시각 잔상을 연구한다던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으니, 연구를 계속할 수도 없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제한이 많았거든.



페히너는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은 암흑 속에서 우울하고 두통에 시달리다가 눈이랑 전혀 상관없이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가려운 등 갖가지 심인성 증상에 시달렸어. 어쩔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어, 가만히 있다가도 비명을 지르곤 했어.


페히너는 시력을 잃고 강제로 어둠 속에 갇혀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됐어. 고통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


기적이 일어난 건 3년 후였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흐릿하지만은 뭔가 보이기 시작했어. 그렇게 조금씩 회복에서 몇 년 후에는 완전히 시력을 회복되었어! 완전히 시력을 회복한 그는 다시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고, 남은 생애는 지난날 자신을 사로잡은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철학적-과학적 탐구를 시작했어. 그렇게 탄생한 학문이 '정신물리학(Psychophysics)'이야. 심리학의 형이라 할 수 있지.


정신물리학자로서 페히너가 했던 연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페히너의 법칙'이라는 공식이야. 베버의 연구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베버-페히너의 법칙'이라고도 불려.


S= k log R


 S는 어떤 자극의 지각된 크기인 감각이고 k는 상수, R은 이 자극을 물리적으로 측정한 값이야.

이 공식을 바탕으로 그래프로 만든 것이 이거야. (헤이, 두산피디아. R을 I로 했네.)



예전부터 페히너는 베버의 연구를 알고 있었지만, 별 관심이 없다가 시력을 잃고 내면 탐구를 하고 나서는 관심이 갔지. 이 페히너 법칙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거야.


이제 신입 마음관찰자들이여, 집중하라. 네가 눈을 감고 왼 손에 30g 질소과자와 오른손에 33g 질소과자를 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 차이를 수치로 하면, 3g이지. 그리고 계속 눈 감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왼 손에는 60g의 질소과자, 오른손에는 66g의 질소과자를 들게 했어. 그럼, 넌 이 차이를 어떻게 느낄까? 넌 첫 번째의 경우와 똑같다고 느낄 거야. 실제로는 6g의 차이가 나긴 하지만. 주관적으로 동일하게 느끼지.


이걸 경제학적으로 응용하면, 소비자 심리학 영역이 되겠지? 만원 대 만천 원과 2만 원 대 2만 2천 원의 차이는 소비자에게 동일한 차이로 느껴진다는... 상담이나 인지 심리학으로 넘어오면, 개인의 스트레스 강도 차이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지.


질소과자의 엑스레이 촬영 사진


이 외에도 자극강도가 특정 역 이상으로 증가하면 최소 식별 차이 만을 경험한다는 절대역, 이전 자극과 다름을 인식할 수 있는 차이역이 있고, 한계법, 항상자극법, 조정법, 최소식별차이법, 정오사례법, 평균 오류법 등의 실험 기법을 개발했어. 그래서 페히너는 실험심리학자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지. 실험심리학자들은 10월 22일을 'Fechner Day'로 기념해 챙긴대. 페히너 데이인 10월 22일이 페히너에게 어떤 날인 줄 알아? 1850년 10월 22일, 시력을 완전히 되찾은 페히너가 정신물리학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은 날이야!



19세기 독일 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심리학의 태동을 알리는 움직임이 있었어. 그런데 내가 페히너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페히너가 심리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야.


심리학이 인간을 연구하는 철학이라는 어머니와 다른 이유는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데 있어. 내가 이전 글에서 프시케와 에로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프시케의 기름등잔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그 기름등잔이 심리학자에게는 '과학적 방법론'이야. 그래서 상담을 제외한 꽤 많은 심리학자들이 프로이트와 융을 심리학자라 부르지 않는 이유기도 해. 과학적 방법론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안다'라고 얘기할 수 없다는 거지.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공헌을 외면하는 건 아니고, 우리 아빠는 아니고 옆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거지, 뭐.


심리학(baby) = 과학(daddy) + 철학(mom)


그렇다면, 이쯤에서 페히너의 반전을 하나 얘기해 줄까?


그렇게 실험심리학자들의 추앙을 받는 페히너는 정밀한 실험도 했지만, 정반대로 유물론을 '밤 풍경'이라 부르고 이것을 '낮 풍경'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어. 낮 풍경이란 우리가 우주의 한 부분이며, 우주는 개체들의 개별적 의식 이상의 거대한 의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거라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개인 의식이 이와 같은 우주적 의식과 합쳐진다고... 다시 말하자면, 페히너는 인간의 마음이란 몸을 매개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이지.


어둠... 죽음... 의식... 우주...

어째 페히너의 시력 상실 사건과 내면 탐구의 결과가 잘 이어지지? 페히너는 엄격한 과학적 실험 방법론을 추구한 사람인 동시에 형이상학적 관념론자이기도 하다는 게 참 재밌지 않니?


우리 안에도 그런 부분이 있잖아.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두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거. (예를 들어, 달고 짠 음식 많이 먹고 싶지만, 살찌고 싶진 않아...)


그럼, 10월 22일은 아니지만, 마음관찰자인 우리도 실험심리학자들처럼 페히너의 사진을 보며 페히너를 기리자고! 건배!


Gustav Fechner(1801~1889)



마지막으로, 네 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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