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와 사람의 몸은 이렇게 닮았다
자신만의 철학(哲學)을 가진 자 철인(鐵人)이 되다
내 직업에 대해 묻는 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철소 고로 연구'라고 설명하곤 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철소나 그 내부에 존재하는 고로에 대해 생소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고로는 우리식 표현인 용광로라는 인식 때문에 'Melting Spot'의 의미와 연결 지으면 좀 더 이해가 된다.
사실 회사생활 초기까지 신입사원 견학을 통해서만 접했고, 대학에선 강의교재에서 도식화된 모식도와 반응식과 열-물질 밸런스만을 현실감 없이 배웠기에 실제로 본 거대한 모습 고로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두꺼운 철피와 내화물구조로 빈틈없이 거대한 성과 같은 고로를 'Black Box'라 부르는 것에 동의가 되었고 동시에 이를 연구대상으로 해 나가야 할지 고민만 쌓였다.
그럼에도 업무로 부여된 고로연구는 현장 학습과 문헌연구를 병행하면서 조금이나마 일반인의 시각을 넘어선 지식 확장이 되었다. 최고층 아파트 규모의 공간과 크기를 가진 고로는 철광석과 코크스를 상부에서 24시간 연속적으로 투입한다. 아래쪽 풍구를 통해 1100°C가 넘는 뜨거운 바람을 밀어 넣으면서 일어나는 내부 반응을 통해 끊임없이 쇳물과 광재를 배출한다.
이 거대 반응기를 이해하려면 나름대로 어떤 형태이든 추상화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았던 은유 대상은 인체였다.
마치 준비된 고형음식을 입을 통해 섭취하며, 음식을 소화기관을 통해 부분적인 소화 이후, 액상으로 변한 음식물을 최종 변환시켜 인체에 유용한 물질과 그렇지 않은 부산물을 주기적으로 배출해 내는 과정을 비유로 해석하였다. 비로소 고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을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 같았다.
이런 유추를 통해 가끔 임플란트를 하려는 주위 사람들에게 장입물 입도관리설비만 신형으로 교체하면 아래쪽의 반응기는 노후화되었는데 균형이 맞지 않아서 몸에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곤 하였다.
고온의 열풍은 노내 환원반응과 용해를 위해 사용되는데, 반응기 하부에서 취입되어 여러 과정을 거쳐 열과 반응 가스를 장입물에 아낌없이 나눠 준 후 상부로 배출된다. 경이로운 것은 이 고온가스가 내부반응에 의해 2000°C 이상의 열을 만들어내지만, 고로를 빠져 나갈 때는 약 130°C 수준이 된다. 이것이 고로가 지난 300여 년 동안 제철공정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효율 높은 공정이 된 비결이다.
즉, 현존하는 열화학 반응기 중 최고의 효율을 가진 공정으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수많은 연구시도와 다양한 지역에서 대가를 치르고 경험된 최적화를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고로도 가끔은 시름시름 앓아 눕기도 한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개념적으로는 하부에서 만들어진 고온의 가스가 차가운 장입물을 제대로 만나 열과 반응가스를 설계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엔지니어는 장입 연원료의 관리, 장입방법, 열풍량의 조정, 그리고 쇳물의 배출방법 등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일상을 보내야 한다.
가끔 뜨거운 반응가스가 미처 반응하지 못한 상태로 고로 상부로 급히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 여지없이 균형이 무너지면서 비정상상태로 전환되곤 한다. 이를 날바람 현상이라 부르는데, 겹겹이 쌓인 철광석과 코크스 층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면서 일어난다.
왜 이런 공간이 생기는지는 원인이 너무도 다양하였다. 연구원활동 기간 중 얼마 동안 이 현상에 대해 조사하고, 예측하는 연구를 하였는데, 후에 생각해 보니 이 현상이 고로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하는 거대한 주제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연구 초보자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이 분야의 숙원과제를 겁 없이 도전했던 것이다.
이 현상은 일단 일어나면 고로가 상당기간 노 내부 온도 저하로 이어져 복구하는데 상당시간이 소요되고, 상부에 위치한 각종 장치가 고온에 노출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설비 교체 등이 필요하다. 초대형 조업 사고인 냉입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대부분의 엔지니어는 이러한 날바람에 대한 걱정으로 발생 기미가 보이면 즉시 조치에 들어간다. 철강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전후방 산업구조상 대형 고로의 장기적 이상 상황은 단일 공장만의 문제를 벗어나 연관 산업의 이슈로 확산되곤 한다.
아직 신입 연구원이었던 어느 나른한 오후, 당시 담당고로의 현장 엔지니어와 이 현상에 대해 각자가 아는 지식과 경험으로 대화했던 오래된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조업 철학을 가진 그가 뜻밖의 자신만의 대안을 설명하였다.
'날바람은 고로 구조상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니 오히려 작은 것 몇 개를 용인하면 더 큰 날바람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마치 신생아에게 수유시 트림 시키기와 같은 것으로, 그날의 대화는 고로가 인체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는 나만의 추상화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여러 현상에 대해 이른바 다양한 공정에 대한 신체적 은유를 통해 나와 타인에게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기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가장 최고의 학문은 추상화가 가능한 분야라고 역설한 누군가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이 최고의 학문이란다. 철학을 다루는 자가 철학자라는 이 분야의 이야기가 무의미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당시 그 엔지니어는 부회장에 임명된 후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지금은 퇴임하였지만, 그날에 깨달은 생각은 내 연구경력과 학문적 여정에서 중요한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고로 기술에 남다른 철학을 가진 그의 모습은 **진정한 '철학(哲學者)자'이자, 진정한 '철인(鐵人)'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떠올린 나 역시 '철인철학자(鐵人哲學者)'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