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고서점에 머물러 있던 제시의 혼이 아니었을까.
사실 명소라서 가보고 싶었고 영화에 나온 곳이기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파리라는, 이름만으로도 지극히 도도한 그 도시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하던 그 문학소녀의 막연하기만 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온 곳. 노트르담 대성당 건너편에 자리한 작은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였다.
정말이지 이곳이야말로 세상에서 책과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교집합이 되는 장소가 아닐까. 비포 시리즈를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행을 떠나기 전 노트북에 다운로드한 몇 편의 영화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비포 선셋'에서 남녀 주인공은 이 서점에서 재회를 한다. 재회라는 말은 마치 '처음'이라는 단어처럼 설렌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일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남은 결코 한 사람의 뜻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랑처럼 두 상대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남은 결코 우연이 될 수도 우연히 일어나서도 안 된다. 그것은 곧 필연이다. 필연이어야만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말이다.
나는 그곳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제시처럼 영화 같은 인연을 꿈꾸며 딱히 누군가를 기다린 것은 아니다. 훅 밀려 들어오는 책들의 꿉꿉한 그 냄새가 내 발목을 잡았다. 오래된 서점인 탓일까. 흔히 갱지를 쓰는 외국 서적들 때문일까. 공간이 협소해 북적이는 서점 안에서 나는 그렇게 오래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나만 멈춰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의 시간이 다른 이들과 달리 아주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때 먹어 치우듯 독서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이틀에 한 권 꼴로 책을 읽기도 했다. 가장 바쁘게 취업을 준비해야 했던 졸업반 시절이었다. 한가해서가 아니었다. 특별히 무슨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시공간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그 시간이 좋았다. 서점을 자주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책을 자주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서점에서 늘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눈으로 훑고 손으로 적어가곤 했다. 주로 도서관에 신작을 신청했고 장르 불문하고 많은 책을 골라 읽었다. 딱히 기준이라는 것은 없었다.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그저 남의 손때가 상대적으로 덜 탄, 새것으로 보이는 책을 고른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만은 그렇지 않았다. 깨끗하고 마치 인쇄소에서 갓 찍어낸 듯한 따끈한 책. 예전엔 그랬다. 그때는 그런 게 좋았다.
※ 위 사진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와는 무관한 사진임을 밝힙니다.
낯선 고서점에서의 오래된 책 냄새가 내 온몸을 휘감아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