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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
by 리아 Oct 01. 2018

가방의 무게

여행 도중에 우리는 종종 지치기도 하니까.

요즘에는 부쩍 무거워진 몸 때문에 가급적이면 단출하게 짐을 싸는 편이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했다. 옷이 두터운 겨울이기도 했거니와 짐을 싸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때였다.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절,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나의 캐리어에는 넣어도 넣어도 끝이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아무리 옷들이라지만 그 부피는 캐리어를 한 가득 채우고도 부족했으며 무게는 어느새 내가 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유럽의 바닥은 모두 울퉁불퉁하여 캐리어를 끌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짐들이었다. 서양인들이 자기 상체 길이만 한 백팩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캐리어의 360도 회전 바퀴가 무색할 만큼 내 캐리어는 유럽의 온 바닥을 쓸고 다녔다. 바퀴는 바닥의 패인 홈 같은 데에 빠지기 일쑤였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끌면 땅으로부터 무려 30센티는 날아오르며 내 발걸음을 좇았다.


패인 홈에 덜컹거리는 캐리어 때문에 내 마음까지도 우당탕쿵탕! 그러나 때론 제멋대로인 바닥 타일을 세어 보는 재미도 있다.



D는 나가려던 참에 친절하게도 발걸음을 돌려 나의 캐리어를 올려다 주었다.

내가 본 그의 첫인상은 스포츠맨이었다. 그 위험하다는 파리의 밤거리에서도 결코 위협당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장한 체격에 어딘지 무서워 보이는 얼굴까지. 동양인이라 하여 절대 쉽게 건들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은 험악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도 첫 만남에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 숙소의 문 앞까지 가져다준 그는 사실 선생님이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했을 때, 분명 체육 선생님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수학 선생님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날 겨우 마음을 놓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 일찍 예정되어 있던 숙소로 옮겨야 했다. 그 와중에 마음까지 축축해질 만큼 유럽 하늘의 비를 맞으며 이동했기에 나는 몸도 짐도 천근만근이었다. 그 순간 그는 참으로 구세주였다.


이탈리아 어느 항구 근처 기차역에서 만난 T는 나의 짐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짐도 모두 들어준 친절한 일본 청년이었다.

과감하게도 바르셀로나에서 치비타베키아까지 가는 배를 탑승한 나는 승선 전 한국인의 탑승 유무를 물었으나 오직 나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무려 근 3시간 넘게 출항이 지연되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에게 여러 차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승선 이후, 선내에서 동양인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같은 선실에 스무 시간 동안 함께 한 고마운 이탈리아 아주머니 덕에 무사히 배에서 내리고 로마행을 타기 위해 치비타베키아 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비슷한 외모의 젊은 남자를 만났다.

로마에서는 굳이 만남의 장소를 정할 필요가 없다. 트레비 분수 앞이라면 그 누구도 만날 수 있으니까. 내가 그를 다시 알아본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겨우 막차를 잡아 탄 그 일본 청년과 이탈리아 노부부와 이탈리아 여자, 그리고 나까지. 일본 청년은 제 몸보다도 높은 가방을 짊어진 채 계단이 많던 치비타베키아 역을 오르내리며 우리의 캐리어를 모두 들어주었다. 기본적인 영어조차 잘 하지 못했던 그와 우리말, 일본어, 영어를 섞어가며 담소를 나누었고 선내에서 얼어있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한 테르미니 역에서 나의 숙소까지도 기꺼이 나의 짐을 들어주던 마음씨 좋은 청년이었다. 자신의 숙소를 찾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거대했지만 어딘지 따뜻해 보였다.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 가방의 무게는 얼마나 되냐구요? 나의 뒷모습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니 당신이 알려주지 않을래요?

여행 도중 가방은 종종 무거워지기도 하고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 이유가 비단 가방 안에 든 잡다한 물건들 때문은 아니다. 힘들 때 마주한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 덕분에 내 어깨의 가방은 가벼워지기도 하고, 괜스레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 들어 한없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여행 도중 만났던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여행 중에 그리고 여행이 끝난 이후에도 꾸준히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것은 어쩌면, 그들의 온정 어린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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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삶이 여행이 되는 순간순간을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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