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도중에 우리는 종종 지치기도 하니까.
요즘에는 부쩍 무거워진 몸 때문에 가급적이면 단출하게 짐을 싸는 편이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했다. 옷이 두터운 겨울이기도 했거니와 짐을 싸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때였다.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절,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나의 캐리어에는 넣어도 넣어도 끝이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아무리 옷들이라지만 그 부피는 캐리어를 한 가득 채우고도 부족했으며 무게는 어느새 내가 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유럽의 바닥은 모두 울퉁불퉁하여 캐리어를 끌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짐들이었다. 서양인들이 자기 상체 길이만 한 백팩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캐리어의 360도 회전 바퀴가 무색할 만큼 내 캐리어는 유럽의 온 바닥을 쓸고 다녔다. 바퀴는 바닥의 패인 홈 같은 데에 빠지기 일쑤였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끌면 땅으로부터 무려 30센티는 날아오르며 내 발걸음을 좇았다.
내가 본 그의 첫인상은 스포츠맨이었다. 그 위험하다는 파리의 밤거리에서도 결코 위협당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장한 체격에 어딘지 무서워 보이는 얼굴까지. 동양인이라 하여 절대 쉽게 건들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은 험악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도 첫 만남에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 숙소의 문 앞까지 가져다준 그는 사실 선생님이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했을 때, 분명 체육 선생님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수학 선생님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날 겨우 마음을 놓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 일찍 예정되어 있던 숙소로 옮겨야 했다. 그 와중에 마음까지 축축해질 만큼 유럽 하늘의 비를 맞으며 이동했기에 나는 몸도 짐도 천근만근이었다. 그 순간 그는 참으로 구세주였다.
과감하게도 바르셀로나에서 치비타베키아까지 가는 배를 탑승한 나는 승선 전 한국인의 탑승 유무를 물었으나 오직 나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무려 근 3시간 넘게 출항이 지연되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에게 여러 차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승선 이후, 선내에서 동양인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같은 선실에 스무 시간 동안 함께 한 고마운 이탈리아 아주머니 덕에 무사히 배에서 내리고 로마행을 타기 위해 치비타베키아 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비슷한 외모의 젊은 남자를 만났다.
겨우 막차를 잡아 탄 그 일본 청년과 이탈리아 노부부와 이탈리아 여자, 그리고 나까지. 일본 청년은 제 몸보다도 높은 가방을 짊어진 채 계단이 많던 치비타베키아 역을 오르내리며 우리의 캐리어를 모두 들어주었다. 기본적인 영어조차 잘 하지 못했던 그와 우리말, 일본어, 영어를 섞어가며 담소를 나누었고 선내에서 얼어있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한 테르미니 역에서 나의 숙소까지도 기꺼이 나의 짐을 들어주던 마음씨 좋은 청년이었다. 자신의 숙소를 찾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거대했지만 어딘지 따뜻해 보였다.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여행 도중 가방은 종종 무거워지기도 하고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 이유가 비단 가방 안에 든 잡다한 물건들 때문은 아니다. 힘들 때 마주한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 덕분에 내 어깨의 가방은 가벼워지기도 하고, 괜스레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 들어 한없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여행 도중 만났던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여행 중에 그리고 여행이 끝난 이후에도 꾸준히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것은 어쩌면, 그들의 온정 어린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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