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주 May 31. 2024

엄마

생각하는 우체통

  "엄마"

  "응?"

  "오분만 있다 깨워줘."

  딸이 나를 부른다. '엄마'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엄마라는 말이 주는 포근함. 그리고 몸 속으로 퍼지는 따스한 기운. 'ㅁ' 이 들어간 말은 몸속으로 소리가 울린다. 티벳 승려가 오체투지를 하며 말하는 '옴마니반메훔'은 내 몸을 울리고 우주를 울려 기도가 이뤄지리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옴마니반메훔'은 진언으로 몸과 마음이 우주와 소통하게 되며 다시 윤회의 고리에 생이 놓여지지 않게 해달라는 열망을 담은 뜻이라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뜻과는 별개로 실제 옴마니 반메훔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소리가 안으로 스며들어 몸이 울림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모든 언어들 중 나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의 단어는 대체로 비슷하다. 엄마, 마마, 맘마. 엄마가 주는 그 따스하고 몸을 울리는 느낌, 그래서 내가 들으면서도 나의 엄마를 떠올리고 눈물부터 난다.



  딸이 며칠째 잠들기가 힘들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생활로 인한 정신적 부담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딸이 편하게 잠들지 못하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 아이만 그럴까. 세상의 모든 딸들과 아들들이 그렇겠지. 아침을 지으면서 한숨을 쉬게된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하고 자식을 낳으려하지 않는 그들의 깊은 내면의 고통이 느껴진다. 그게 다 내 탓 같고 우리 세대의 탓 같아 미안하기만 하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동, 보통의 상식과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이면이 궁금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엄마의 부재.  엄마가 있어도 채찍질을 휘둘렀던 조련사로서만 존재하는 엄마만 있던 것은 아닐까. 엄마가 갖고 있는 그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정서가 결여된 게 아닐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교만한 태도를 버린지 오래다. 누군가를 따스한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을 거라는 오만도 이젠 버렸다. 내 품이 작아서이기도 하고 학습되지 않은 따스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엄마의 부재가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은 남자는 평균 14년을 더 산다는 연구결과가 영국의 한 대학에서 조사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이란 나라가 워낙 이상한 연구결과를 가진 나라라서 신빙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말에도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자식에겐 얼마나 좋은 잔소리를 할까. 하지만 훌륭한 조련사를 만난 말이 명마가 되기도 하지만 그 조련사 때문에 죽기도 하는 것처럼 엄마의 잔소리도 심하면 독이다. 일부 엄마가 지나치게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명마의 조련사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다. 잔소리가 많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이다. 하지 말라는 게 많았다. 하면 안되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너무 순응해서 하고 싶은데도 하지 못했던 게 많았다. 가끔 내가 어떤 일을 쉽게 포기하거나 도전하지 못하는 게 엄마 탓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푸념을 딸 아이가 내게 한다. 엄마의 과보호가 겁쟁이로 만들었다고. 하지말라는 게 너무 많아서 도전하는 걸 쉽게 하지 못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 없게 되면 저 아이도 나를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할 텐데. 


  "엄마, 세상 살면서 내가 하지 못하는 모든 억울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엄마 뿐인 거 같아. 그래서 엄마한테 그럼 안되는데 자꾸만 엄마한테 그러는 거 같아."

  미안함을 담아 내 허리를 안으며 '그래서 엄만 일찍 죽으면 안돼' 하는 아이의 말이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 맘도 알 거 같다. 나도 그랬던 거 같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가장 고마우면서도 가장 만만한 존재였던 것 같다. 아버지 기일에 부모님이 계신 납골당에 갔더니 아버지의 철 없어 보이는 환한 웃음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땅한 사진을 찾지 못해 웃지 않고 있는 엄마의 사진이 늘 마음에 거슬렸는데 그날 따라 엄마의 얼굴이 편해 보인다. 


  세상에 완전히 편한 존재는 없다. 혼자 있을 때 나 자신이 불편할 때도 있는데 함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갑자기 불편할 때가 있는데 심지어 엄마조차도. 그럼에도 유일하게 몸 안에서 따뜻한 기억과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건 엄마 뿐인 거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