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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Mar 29. 2024

연애소설 읽는 노인

책 읽는 우체통

연애소설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열린 책들


  아주 오래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사람들의 입에서 이 책이 다시 회자되고 나는 축축한 우기의 남아메리카의 어느 도시가 떠오르고 기억에 없었다. 흡사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의 느낌을 누군가에게 듣고 그 기억으로 버티는 사람처럼. 그러다 문득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다른 책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를 읽은 후였다. 동화책 같은, 그렇지만 동화책이라기보다 철학책에 가까운 그 책을 읽고 나서야 그의 다른 책을 읽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연애 소설’이 들어가는 책이었지. 그리고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얼른 구입했다(이전의 책은 몇 번의 이사로 처분하고 없기 때문이다).     

  다시 읽은 이 책에서 나는 우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아주 조금이었는데 왜 그토록 축축하고 비장한 노인의 하루를 떠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렸다. 이전에 읽을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 그때는 노인과 바다를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헤밍웨이는 연애소설을 잘 쓰는 작가이기도 하니까. 전쟁을 배경으로도 남녀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니까.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정글에서 살아남은 노인이다. 아마존 부근 엘 이딜리오에 살고있는 노인은 아내와 고향을 떠나 엘 이딜리오에서 정착하려고 했지만 낯선 곳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내는 죽고 열악한 환경에서 그의 생존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곳의 주인이었던 수아르족에게서 생존의 기본을 익히기 시작한다. 정글에서 동물들과 공존하는 법을 익히고 살아온 수아르족은 그곳을 침략해 온 양키들에게 점점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중이었다. 멋대로 침략해서 약탈과 훼손을 하던 침입자들은 동물들과 공존하는 법을 익힌 인디오족을 노예로 삼고 함부로 한다. 정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본능과 직관, 그리고 공존과 배려인데 결국 무차별적으로 정글을 침략해서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문명인들의 횡포는 갈수록 도가 지나친다. 결국 암살쾡이의 가족을 해친 백인으로 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노인은 함께 간 일행이 모두 떠나자 혼자 남아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암살쾡이와 마주한다. 


  사무엘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에서 1980년대 말 공산세계가 무너지면서 탈냉전 시대에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고 문화라고 말한다.(문명의 충돌 p27) 포괄적 차원에서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은 과거에 미개한 지역에(그들의 관점에서)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을 이용했다. 지구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 지구의 환경을 바꾼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늘어나는 기후위기의 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의식주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과거 문화라는 이름으로 침략당하지 않은 미개한 지역의 사람들은 문명이란 거대한 문화적 집단이 만든 혜택 대신에 자연 속에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도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최소한의 살상과 파괴를 지양하는 방식의 삶을 선택했다면 서구의 문명은 그들의 삶을 짓밟고 자신들의 것이 우위에 있는 것인양 개발을 목적으로 파괴와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는 제목 그대로 느리게 여행한 덕분에 발견하게 되는 많은 것들의 가치를 깨닫는 달팽이의 여정이 담긴 동화이다. 하이네는 철도의 발전으로 역마다 새로운 공간과 도시가 설계되었지만 격하게 말해서 공간이 살해당했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선택한 책은 연애소설이었다. 왜 연애소설일까. 그가 원시의 상태에 가까운 엘 이딜리오에서 정착할 수 있었던 방법은 그곳의 원주인 인디오 부족 수아르족의 삶의 방식이었다. 달달하지만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그려져있는 연애소설은 수아르족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백인 양키로 표현되는 이들의 침략은 암살쾡이의 서식지와 그들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결국은 위기로 빠트리기까지 한다. 잘 살고 있는 이들의 땅을 침략해 부수고 새로 건립하는 세계는 과연 살기 좋은 곳일까.     


  양키놈들이 나타나 그 짐승들을 싸죽이고 말았소. 수놈과 새끼들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말이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그런데 먹이 사냥에서 돌아온 암놈이 그걸 본 거요. 그때 암놈의 심정은 어떻겠소? 그 짐승은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주위를 배회하다 밤쯤은 미쳐버렸을 것이고 마침내 복수를 결심했을 것이오.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죠.p34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 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p45     


  그때부터 두 사람은 사냥하는 법, 물고기를 잡는 법, 폭우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오두막을 짓는 법, 먹을 수 있는 과일을 고르는 법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밀림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한 일이었다.p51     


  모든 면에서 수아르족이었으니 동시에 수아르족이 아니었다. 수아르족이 아니었기에 일정한 시기가 돌아오면 그들의 부락을 떠나 혼자 지내야했다. 물론 그에게는 서운한 일이었지만 수아르족 이디오들은 차라리 그가 수아르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근히 반겼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와 다시 만나는 순간에 그간에 보고싶었던 감동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p60     


  수아르족과 생활했지만 그들처럼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고 환각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거나 그들처럼 자신의 육신을 개미들에게 갉아 먹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고 설사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모습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p63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p72     


  노인은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는 수아르족 인디오의 말을 떠올리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p122     


  그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그때서야 노인은 눈앞의 현실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p143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p144     


  짧은 책이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이전에 읽었을 때도 몸이 묵지근하니 무겁게 축축한 느낌이 남았던 것 같다. 긴 우기에 삶과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한 노인이 죽음과 삶의 경계 끝에서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 암살쾡이와 대치하며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지쳐 죽음을 기다리는 한 마리 동물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마주하는 느낌이었으리라. 그래서 이 소설이 더 극적인 것이 아닐까. 

  우린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앞으로만 달리는가. 무엇 때문에 팽창의 욕구에 시달리며 살육하고 파괴하는가. 문화의 팽창이 인간의 삶을 더 나아가도록 한 것일까. 밀림에서 친구의 마법과도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는 작가의 말에 문득 코타키나발루에서 만났던 반딧불이의 화려한 비상이 떠올랐다. 성탄트리에서 반짝이는 조명처럼 날아다니던 반딧불이.그곳이 온전히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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