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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14. 2021

Ep.12_한 여름의 12월

호주에서 맞은 한 여름 속 생일잔치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다. 그 말인즉슨 나의 생일도 다가왔다는 것. 크리스마스 4일 전, 12월 21일, 1221, 거꾸로 해도 1221. 주입식 교육 끝! 


사실 생일 당일에는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자르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을 하지 않는 나였다. 그러나 함께 사는 메이트는 플래너 중의 플래너 타입의 사람. 그녀는 본인의 계획을 잘 세울 뿐 아니라 남의 계획도 무척 궁금해하는 사람이라 12월이 시작되면서부터 내게 생일에 무얼 할 건지 계속 물어왔다. 매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리다 결국 생일파티를 해볼까 한다고 운을 띄웠다. 원래의 생각은 메이트와 친구들을 초대해 한국식 저녁 잔치를 벌여보는 것이었으나, 메이트가 때마침 결혼식 참석을 위해 발리로 떠나게 된 터라 그녀의 참석은 무산. 메이트가 흔쾌한 허락을 해주어 그녀 없이 친구들만 불러 생일잔치를 하기로 했다.



언제 해보았던가 집에서 하는 생일잔치. 초등학교 때 다섯 명 정도를 집으로 불러 피자 치킨 등을 시켜놓고 먹었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면 20년 정도 되었네... 아주 오랜 공백을 깨고 하게 된 행사라니, 계획을 세운 순간부터 마음이 콩콩거렸다. 두 명의 친구들에게 넌지시 생일파티 초대를 전하니, 한국 친구 연아는 잡채를 만들어온다고 했고 데이지는 와인을 들고 오겠다고 했다. 혼자 보내기 외로워 친구들 초대해 밥 한 끼나 먹으려 한 건데, 혹시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하고 사양할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나의 경우에도 초대받은 곳에 뭐라도 들고 가는 것이 더 기쁘게 느껴지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사실 한국 잔치의 감성으로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모든 것을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호주의 홈 파티는 다들 뭐 하나씩을 가져와서 함께 즐기는 문화가 더 보편적인 것 같았다. 미국 및 캐나다에서는 팟럭(potluck, 각자 음식을 가져와서 여는 파티) 문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호주도 비슷한 것 같았다. 대체적으로 서양은 홈파티가 잦은 문화권이니 '팟럭'이 서로 부담 없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인 듯했다. 무튼 그래서 나도 호주 스타일을 좀 빌려보자 마음먹었다는 말이다.



12월은 호주의 한여름. 불타오르는 날씨 속에 열심히 일했다. 출근하는 길에는 큰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는데, 그 15분 동안 내 속에서는 오징어 한 마리가 구워지는 것 같았다. 불 위에서 타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오징어. 또 유니폼은 왜 까만 티에 까만 바지인지. 온 동네 햇빛은 내가 다 몰아와 까만 오징어를 굽는 15분. 몸의 어느 한 부분이 타서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거센 햇빛 탓이었다. 가끔 귀찮으면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는 나였는데, 이 때는 정말 살기 위해 보습크림을 바르고 선크림도 꼬박꼬박 챙겨 발랐다. 그 귀찮던 선글라스도 마찬가지다. 호주에 오자마자 단 하나였던 선글라스를 잊어버려서 그냥 다니다, '이러다 눈이 멀면 어쩌지'하며 새 선글라스도 급하게 산 터였다. 그 약간의 온도와 습도 변화가 사람을 바꿔 놓았다. 그래도 생일잔치 준비와 스스로 줄 선물에 플렉스 할 생각을 하면 호랑이 기운이 솟았다. 신발 밑창이 닳고, 옆 창에 구멍이 날 때까지 열심히 쟁반을 나르던 날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목표가 힘이 부치는 나날에 에너지를 듬뿍듬뿍 충전해줬다.



드디어 디데이. 그날도 여지없이 오징어를 구우며 마트에 도착했지만, 일도 안 하고 잔치만 할 생각을 하니 신나서 춤을 추는 오징어가 되었다. 혼자서 카트 가득 장을 보는 일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가 선택한 메뉴는 불고기. 생일 아침이면 언제나 달달하고 짭조름한 향기를 풍기며 상에 오르던 메뉴였다. 그러나 오늘은 엄마가 아니라 내가 요리사. 마트에 파는 불고기 양념만 있으면 그 맛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신나게 볶기 시작했다. 양념에 재워둔 고기를 먼저 볶다가 채 썬 당근, 양파, 양배추 등을 넣고 숨이 살짝 죽을 때까지 볶아내는 것. 잡채만 해온다던 친구는 깜짝 선물로 미역국도 끓여와서 완벽한 생일 상이 되었다. 코리안 트레디셔널 벌스데이 파티. 갓 지은 냄비밥까지 한 상 차려 놓으니 소박하면서도 근사했다. 성인이 되어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것도, 내 손으로 직접 차린 생일 상을 차린 것도, 한 여름에 생일을 맞는 것도 모두 다 처음이었던 특별한 날.



사실 이 날이 더 특별해진 데에는 그다음 날의 특별한 일정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흐르는 음악 속에 아기자기 장식해 놓은 트리 옆에서 와인과 디저트까지 달콤하게 즐기던 밤. 잔치는 끝이 나고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콩닥콩닥 잠들 줄을 몰랐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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