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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n 01. 2021

Ep.13_선셋 로맨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마음이 들뜰거야'


그날의 일정이 미리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생일잔치가 끝나고 친구들이 돌아간 후 W와 나눈 메시지를 통해 정한 일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당일 약속을 잡은 셈이다.


"바다에 모래성 만들러 갈래?"


알파벳들이 이룬 문장들이 오가던 중 W가 던진 물음에 먼저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화 속 피터팬이 웬디에게 던질 법한 멘트랄까. 더군다나 그는 우리말을 배운 지 1-2년 정도 되었을 뿐인 외국인이라 그런지 멘트가 주는 귀여움과 풋풋함이 마구 풍겨 나왔다. 대체 저런 말을 어디서 누구한테 배웠는지부터 물어보고 싶었지만 "What an amazing plan"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렇게 햇살이 느리게 잦아드는 오후 세시, W가 집 앞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W와 나는 언어교환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났다. 어쩌다 보니 두 번째 만남에 단둘이 밥을 먹게 되면서 모임 이외의 우리들만의 언어교환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W의 스카이프를 통한 언어교환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와 나의 생각이 닿는 지점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데다, 좋은 호주 문화와 영어 선생님이 생기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로 유학을 떠나기 전이어서 대부분의 스카이프 만남은 내가 출근하기 전이나 쉬는 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엔 긴장도 좀 되었던 것이 갈수록 그 재미가 커져 나중엔 1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시간이 2시간을 훌쩍 넘겨 출근을 헐레벌떡해야 했던 날도 여럿 있었다. '스카이프 할래?'라는 메시지는 그날 하루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더랬다.



우리의 계획은 해변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석양을 감상한 후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W가 이 계획을 단숨에 전할 때 마음이 콩닥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왠지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첫 데이트 코스 같았다고 하면 너무 순진한 소녀같을까. 그저 코스가 그리 짜진 것뿐이었다만, 자주 드라마와 영화 속에 사는 나는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기 일쑤다. 귓가에 달콤한 BGM을 불어넣으며 그 순간들이 얼마나 로맨틱할까 잠깐 상상에 나래를 펼쳤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이 언제나 같진 않지. 상상에는 매서운 바닷바람 따위는 없었으니 말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살짝살짝 내리쬐는 햇빛뿐이었는데, 현실의 날씨는 흐리고 매서웠다. 공들여 준비한 우아한 자세는 바닷바람과 모래들에게 머리칼과 뺨을 내어주고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래성이나 열심히 만들자고 마음먹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내버려 두고 놀이터에 나가 놀던 10세 어린이 모드가 되어 신나게 모래성을 쌓았다. 열심히 만들고는 인증샷도 멋지게 찍고 싶었지만 바람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으니. 그래도 모래성을 쌓으며 여러 종류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대화들이었는지는 어렴풋하나 분명 모래성은 좋은 대화의 매개가 되었다.



선셋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주변을 느긋하게 산책했다. 서로에게 쌓인 20여 년의 역사를 나누다 보면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더불어 우리가 언어교환 중이란 사실을 잊지 않고 사이사이의 공백에도 궁금한 단어와 문장으로 빼곡하게 채웠다. 아주 느슨해졌던 시간은 내가 싸 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해가 넘어가는 장면을 감상할 때였다. 여행자로서 석양을 바라보는 것은 꽤 수동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다. 아니 어찌 보면 꼭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석양을 보기 위해 어디를 방문한 일도, 오로지 석양을 바라보기 위해 기다린 일도 없었다. 어딜 가면 석양이 담긴 그림이나 사진을 꼭 집어 들게 되면서도. 그 붉고, 분홍 하고, 보라한 오묘한 빛깔을 언제나 사랑하면서도 어딘가로 향하던 중에 마주하거나, 저녁을 먹고 하는 설거지 중에 창 너머로 마주하던 게 다였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오로지 석양, 그 만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로맨틱하게 만들어 준, 새벽부터 맘을 들뜨게 한 장본인이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마음이 들뜰 거야.'라고 했던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말처럼.



반전이 있다면, 생각보다 그 시간은 상상처럼 로맨스 영화스럽지는 않았다. 우리는 언어 교환하는 친구일 뿐이었으니 하하. 그러나 석양만큼은 호주에서 봤던 중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날씨가 흐려 무척 선명하진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로맨틱한 그런 해넘이.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린 마음이 만들어 준 로맨틱함이었을까. 그 후로도 우리는 역시 자주 그리고 오래 스카이프를 했고, 만나는 빈도도 점점 잦아졌다. 서로의 운동화와 티셔츠를 골라주기도 하고, 서로의 친구들도 함께 만났으며, 맛있는 걸 먹고 같이 오래도록 걸었다. 오가는 시간의 밀도가 촘촘해질수록 나누는 마음의 밀도도 덩달아 차올랐다. 외롭고 지치기만 하던 흐리던 외국 생활에 햇살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W의 출국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 나는 일이 점점 바빠졌다. 스카이프도 만나는 일도 줄어드니 왠지 그와 나누는 대화가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도 잘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은 늘어갔다.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이면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이 더 그리워졌다. 그때 가장 자주 만나던 W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출국 준비로 바쁘다는 말에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려다 도로 집어 넣었다. 바쁘다는 말은 다 핑계라는 말이 생각나 속상하고 서운했지만 나의 출국 전의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을 토닥였다. 그렇게 몇 차례의 연락을 더 주고받다 그는 홀연히 떠났다. 우리의 인연도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보면 W 덕분에 춥고 건조하던 마음이 따뜻하고 촉촉해진 시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열정왕인 그 덕분에 삶에 성실을 더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쉽게 끝나버리긴 했어도 좋은 시간을 선물해 준 고마운 사람. W가 처음 차 문을 열어주던, 운동화를 신어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던 내게 본인의 플리플랍을 건네주던, 내게 필요한 것들을 고이고이 챙겨 와 깜짝 전해주던 그 손길이 종종 아른거려 기분좋은 미소를 선물한다. 어디서든 좋은 사람들과 웃고 먹고 걸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로맨틱한 나날을 즐기고 있길. Thanks,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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