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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25. 2021

Ep.4_미션: 호주 퍼스에서 집을 구하라(2)

워홀러의 호스텔 탈출기 2탄

아직 밖이 훤한데도 카페에서 나와 갈 곳은 마트나 호스텔뿐이었다. 그럼 마트라도 가서 시간을 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날 아침 호스텔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 때문에 정말이지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5시간 동안 집중해서 집을 찾는데 도움을 준 소동이기도 했다.



사건은 내 침대 아래층을 쓰는 친구와의 첫 만남으로 시작됐다. 어김없이 아침 일찍 산책을 하러 침대 2층에서 내려와 캐비닛을 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너 언제 왔어? 그 사물함 내 건데 왜 네가 써?" 잠이 덜 깬 목소리에서도 느껴지는 신경질적인 에너지. 그녀는 대체 왜 화가 난 걸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뇌를 빠르게 가동했다. 내가 쓰고 있는 사물함이 본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 비어있는 아무 사물함이나 쓰라고 해서 당연히 주인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친구 오히려 짜증을 더 내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그 친구는 호스텔에 오래 머물러 온 장기 투숙객인데, 잠시 캐비닛을 비우고 여행을 다녀왔더니 내가 본인의 소중한 캐비닛을 가로채갔다는 것.



공동생활을 하는 곳에서 이름표도 자물쇠도 없는 것이 본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기가 찼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다짜고짜 내게 화를 내는 건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훅 들어온 무례함에 인내심의 게이지가 차오른 나도 조목조목 그녀에게 맞섰다. 나도 물리면 으르렁할 줄은 안다 이거야.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성질을 내는 걸 보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냥 화를 내고 싶은 거구나. 물러서지 않고 언쟁을 벌여봤자 소용없겠다 싶어 태세를 전환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네 것인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지금이라도 비워주겠다. 영혼도 없고, 빈틈이 많은 사과였지만 잠이 제대로 깨기도 전 입은 데미지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빠르게 사물함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 거친 아침으로 시작해 이어진 긴 하루였다. 해는 아직 저물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환한 빛을 내었지만 내 기력은 이미 다 저물고 사라진 후였다. 다른 생각 없이 침대 2층 내 공간으로 올랐다. 아래층의 그녀가 일찍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평온한 휴식을 가지던 중 덜컥 문이 열렸다. 긴장이 무색하게 아래층의 그녀는 아니었다. 4명이 머무는 방에서 유일하게 만나지 못했던, 맞은편 이층 침대의 위층을 쓰는 이웃이었다. 그녀는 대만에서 온 데이지라는 친구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여행 중 항상 던지게 되는 질문을 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왔어?"



근처에 있는 작은 섬에 캥거루를 보러 갔는데, 멀리서 아주 살짝만 보고 돌아왔다며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아주 비슷한 상황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2주 정도 먼저 온 선배였는데, 나처럼 호스텔 생활이 힘들어 빠르게 집을 찾는 중이라고. 겨우 3일 차에 불과한 나는 벌써 한국에 가고 싶어 눈물이 다 난다고 했더니, 그녀는 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진다고 토닥여줬다. 조금이라도 길을 먼저 걸어간 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생각보다 큰 위로와 용기가 얻는다.



둘 다 외롭던 차에 대화 상대를 만나 반가웠는지 그 후로 1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더 나누었다. 비슷한 데가 많았다. 나이와 전공이 비슷했고, 고국에 두고 온 반려동물 친구들이 있는 것도 그랬다. 여러 공통분모는 금세 마음이 가까워지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복덩이 같은 그녀가 걱정을 하나 덜어주었다. 집을 혼자 보러 가는 것이 무섭고 걱정된다고 했더니 "나 내일 아무것도 안 하니까 같이 가줄게!" 이럴 수가, 겁쟁이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데이지의 흔쾌한 제안으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아래층의 그녀가 여전히 신경 쓰였지만,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나 역시 그냥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언제 화를 냈는지도 잊을 정도로 금방 잘 푸나보다 하면서. 다음에 또 말도 안 되는 걸로 화를 내면 나도 참지 않겠다고 이를 악 물었다. 2층 침대에 누워 아무도 모르게. 지니도 물면 참지 않는다!(희망사항)



새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 온 게 너무나 반가웠다.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로 아래층 그녀에게 또 책이 잡힐까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자야 했던 밤. 킹스파크에 가서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면 답답함이 좀 해소가 될 것 같아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나섰다. 오늘따라 광활한 하늘에 자유롭게 떠 다니는 구름에 위로를 받았다. 세상 걱정 없이 들판을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언제나 힐링 스팟, 킹스파크



집을 보러 가기 전 데이지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기꺼이 하루를 내어준 그녀에게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 호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일본 라멘집이었는데, 지나가며 홀리는 냄새에 마음으로는 3번은 들어가 먹었던 곳이었다. 기대만큼 잘하는 집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식사가 오랜만이었던 우리는 금세 한 그릇을 비워냈다. 홀로 하는 식사가 아닌 덕에 마음도 든든히 차올랐다.



첫 집은 관광 안내소에서 추천받았던, 내 기준 ‘안전 주거 지역’에 있었는데,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유학생들이 사는 집이었다. 우리 말고도 같은 시간에 집을 보러 온 다른 사람이 또 있어서 다 같이 러브하우스를 찍듯 그 집의 공간을 탐색했다. 집을 둘러본 후 나와 데이지는 눈빛 교환을 했다. 분명 그 집은 영 아니라는데 둘 다 동의하는 눈빛. 사진에서 보던 집은 아늑했는데 실물은 답답했고, 바쁜 학생들은 청소를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전기료를 아끼려는 건지 온 집의 불을 켜지 않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도 큰 마이너스였다. 돈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는 삶의 밝기를 유지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여러모로 캄캄했던 첫 집은 리스트에서 바로 지워졌다. 실물을 꼭 확인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 첫 인스펙션.



두 번째 집의 주인은 본인을 호텔리어라고 소개했다. 내 메시지를 보고 바로 전화를 해서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며 어눌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같은 한국어를 몇 마디 하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또한 다른 방에는 일본인 여학생이 셰어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친근하고 사교적인 그의 태도는 그 집에 대해 은근한 기대를 심어 주었다. 사진으로 보이던 집도 깔끔한 데다 아파트 내에 공용 수영장에 헬스장까지 있어 무척 화려했다. 이런 게 호주의 아파트인가 싶어 벌써부터 부푼 꿈을 꾸었다. 시내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데다 보안이 잘 되는 아파트라니.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실물이 사진과 같고, 집주인도 전화 상에서처럼 나이스 하다면 바로 계약을 할 마음이었다.



조금 늦는다는 그의 연락에 우리는 아파트 앞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검은 양복 차림의 누군가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전화상에서처럼 젠틀한 사람이었다. 또한 호주 발음에 익숙해지느라 지쳐있던 터였는데, 익숙한 미국식 영어가 들리니 마음이 조금 편안했다. 아파트로 들어서니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세련된 곳이라 고급 호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곳보다 집세가 비싼 이유가 있었다. 부대시설도, 방도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렇게 집을 다 구경시켜 준 후 그가 본인 소개를 했다. 일 때문에 미국에서 호주로 건너왔고, 이혼을 했는데 어린 아들 둘이 2주마다 한 번씩 집에 온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부분이 괜찮은지 내게 물었다. 집에 홀랑 빠져 있던 나는 "저도 그만한 조카가 있어서 애들을 아주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는 집에서 지켜야 할 이런저런 규칙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일본인은 곧 나갈 예정이라고도. 아? 그럼 이 집에 이 분과 나, 둘만 살게 되는 건가? 흠....



집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곧 연락을 주겠다고 인사하고 데이지와 함께 나왔다. 데이지가 집이 어땠냐고 물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너무 좋은데? 집주인도 너무 젠틀하고?"라고 했더니 그녀는 "그래? 난 좀 딱딱하고 진지해 보이던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빨리 호스텔을 벗어나고 싶어 그런 건 눈에 안보였던 것도 같다. 어쨌거나 그때 내게 더 큰 걱정은 집주인 남자 말고는 다른 하우스 메이트가 없는 것.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어린 두 아들이었다. 아이들이 좋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기에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냥 쉬고 싶은 날 장난꾸러기 두 녀석이 찾아온다면? 생각할수록 고민 덩이가 점점 커졌지만, 우선 몇 집이 더 남았으니 그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그날의 집 투어는 끝이 났는데 데이지는 잡투어를 간다고 했다. 시내에서 버스로 30분쯤 떨어진 곳에 일자리가 생겨서 간단한 면접을 보러 간다는 그녀. 그럼 이번엔 내가 그녀의 팔로워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아니면 다시 호스텔 이층 침대 인생인 것을~ 버스를 타고 낯선 풍경을 꽤 오래 거쳐 내리니 눈앞에는 큰 복합 쇼핑몰 건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 전역에 있는 Westfield라는 쇼핑몰이었다. 데이지는 2층 식당가에 있는 일식집으로 면접을 보러 가고 나는 1층에 멋들어지게 놓여 있는 벨벳 소파에 늘어졌다. 그렇게 있기도 잠시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플랫 메이트에서 온 메시지 알림이었다. 아리따운 여성의 흑백 프로필로부터 온,  'Hi, Jinny'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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