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의 호스텔 탈출기
꿈꾸던 곳에 갓 도착했으니 여행하듯 즐겨볼까 했지만, 여행도 마음이 편안한 자에게나 허락되는 것이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주변을 익히고 마트 구경을 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3일 째부터 내게 주어진 미션은 오로지 집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일자리를 먼저 구한 후에 주변에서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듣긴 했지만, 빨리 답답한 호스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와이파이가 잘 되고, 오래 앉아 노트북을 할 수 있는 카페를 검색했다. 호주 카페는 늦은 오후면 닫아 버리기에 비교적 마감시간이 늦은 곳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방문한 곳은 호주의 스타벅스 격인 Dome이라는 프랜차이즈 카페. 주문을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나. 막막함이 순간 스윽 밀려왔다. 우선 주문해놓은 커피와 크로와상 샌드위치를 마시며 머리와 마음을 아니, 허기를 차분히 하는 게 먼저였다.
출국 전 미리 알아본 바로 호주의 1인 가구의 주거형태는 주로 원룸에 사는 한국과는 좀 달랐다. 일반적으로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2명 이상이 하우스 셰어를 하는 것. 월마다 세를 내는 한국과 달리 1-2주 단위로 세를 내고, 보증금도 1주일 치 세의 2-3배 정도를 내는 수준이었다. 월세 보증금도 이 정도로 가벼우니, 전세의 개념은 당연히 없었다. 호주의 주거 시스템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전세 없으면 돈은 언제 모아 집사 지라는 생각에 멈췄다. 나는야 영락없는 한국인이구나. 그래도 큰 보증금 없이 집세 낼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사는 곳을 옮길 수 있는 시스템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외국인들에게 전세 제도를 설명하는 것도 힘들지만, 한국의 전월세 보증금이 왜 그렇게 높은지 설명하는 건 더 어렵다. 그것은 나도 아직 완벽한 이해를 못 했기 때문이지.
주인이 한국인인 경우를 ‘한인 쉐어’라고 부르고, 호주인이 주인인 경우에는 ‘오지 쉐어’라고 부른다. 한인 쉐어를 하면 함께 사는 사람이 다 한국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오지 쉐어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되도록이면 영어를 많이 쓰는 환경에 노출되고 싶었고, 현지인 혹은 외국인들과의 지내며 그들의 생활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반대편의 장점도 많았기에 매우 많이 흔들렸지만 스스로를 경계하며 그렇게 정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내가 한국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게 되면 그에 너무 의지하게 될 것 같았다. 어렵게 나선 모험의 여정에서 더 이상의 모험을 하지 않게 될까 염려한 탓이었다.
검색 전 내가 찾는 방의 조건도 미리 정해 놓아야 했다. 미간을 잔뜩 긴장시킨 고민 끝에 3가지 정도의 우선순위가 만들어졌다. 첫째, 룸메이트 없이 혼자 방을 쓰는 싱글룸이어야 했다. 하루 중에도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내게는 필수 조건이었다. 둘째, 한 집에 2-3명 정도가 사는 곳이어야 했다. 너무 많은 인원이 사는 곳에서는 여러모로 피로감을 쉽게 느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편안함과 안전함을 겸비한 곳인지도 체크해야 했다.
주변에 물어보고 검색해 본 결과 알게 된 세 가지 사이트에 접속해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매물이라는 말을 쓰니 마치 업자가 된 기분. 첫 번째는 검트리( www.gumtree.com.au ). 호주의 벼룩시장 같은 곳이다. 호주 사람들은 검트리에서 집을 구할 뿐 아니라 중고차를 비롯해 여러 물건을 사고팔고 일자리까지 구하는 듯했다. 다른 나머지는 플랫 메이트( flatmates.com.au ) 그리고 페이스북 그룹 페이지였다.
살 지역을 고르는 일이 가장 막막했는데 다행히 시내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다녀온 일이 도움이 되었다. 그곳의 직원에게 어떤 지역에서 집을 구하면 좋을지 물어보니 추천받은 지역이 세 군데 정도 있었다. 당장 그 카페에 나가서도 맵을 켜서 호스텔에 돌아가야 하는 내게는 어둠 속 플래시 같은 정보였다. 노트북에 지도 하나를 켜놓고, 그 옆에는 시내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받아 온 지도도 펼쳤다. 추천받은 지역을 기준으로 시내 부근의 느낌 좋은(?) 지역을 동그라미 표시를 해놓고 본격적으로 집을 보기 시작했다. 매물을 보다 보니 지역과 방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울에서 원룸을 구하는 것과 비교해 월 단위의 세는 비슷했다. 역시나 도심에 가까울수록 비쌌고, 멀수록 값은 내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집인데도 값이 싸다 하면 집에 하자가 있거나 위험지역에 있는 집이었다. 어디나 집 값이 결정되는 생리는 비슷하다.
검트리의 매물이 가장 많았다. 귀찮은 인증과정 없이 편하게 거래를 하는 곳이라 그랬을까. 검트리에서는 맘에 드는 집이 있으면 사이트 내부에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십 수명의 집주인들에게 나를 간략히 소개하는 글과 언제쯤 집을 보러 갈 수 있는지 회신을 바란다는 내용을 담아 메시지를 전송했다. 쉐어 할 사람을 급하게 찾는 사람들에게서는 바로바로 연락이 왔다. 어서 집을 보러 오라는 답장들이 도착하면서 새로운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여기가 어딜 줄 알고 혼자 집을 보러 가…?’ 영화 추격자에서 봤던 하정우의 섬뜩한 미소가 생각났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봤던 끔찍한 이야기들이 머리를 스쳤다.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거지. 사서 걱정하는 편인건 알지만, 무서운 걸 어떻게 해...
공포의 근원을 들여다보자면, 검트리 내에서 거래자의 프로필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였다. 부동산도 중개인도 없는데, 신분을 보장할 수 없는 이와 거래를 해야 한다니… 지나가듯 들었던 외국에서 사기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가, 이런 시스템으로 지내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이 강심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가, 그래 내가 쫄보라 그런 거겠지 라는 생각으로 셀프 진정을 시키며 마무리했다. 그렇다고 호스텔에서 지내는 건 더 싫고,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우선 최대한 낮시간을 이용해 집을 방문하는 일정을 잡았다.
거래자의 익명성에 대한 공포를 그나마 해결해주는 것이 '플랫 메이트'란 사이트였다. 집을 보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만, 게시글을 올리거나 집주인에게 연락을 하려면 적어도 2-3만 원의 비용을 내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내게 복권인 동시에 보험 같았다. 잘 맞는 집을 안전하게 물어다 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결제를 하고 나면 프로필부터 작성해야 한다. 원하는 집의 조건을 간단히 입력하거나 객관식처럼 선택할 수 있어 프로필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지나 맘에 드는 몇 개의 집을 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프로필을 본 집주인들에게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속속 도착했다..
추가로 주문한 커피를 반쯤 남겨놓고 있던 내게 카페 직원이 다가와 마감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어쩐지 달그락 소리가 몇 분 전부터 들려와서 대충 눈치를 채고 있던 차였다. 노트북과 지도를 주섬주섬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카페를 들어간 지 5시간 만이었다.
* 추신 :
개인적으로 두 사이트를 이용한 느낌을 비교해보자면, 검트리는 마치 오래된 커뮤니티 사이트 같고 플랫 메이트는 잘 빠진 어플 같았다. 사이트의 디자인을 비롯한 UI도 그랬다. 검트리만큼 많은 집을 볼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신뢰가 보장되는 공간에서 깔끔한 정보가 입력된 매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왠지 플랫 메이트의 광고를 한 느낌이지만 내돈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