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해는 쨍쨍하지만 아직 찬기가 느껴지는 오전의 바람 속. 광활한 킹스파크를 느적느적 걷다 벤치에 앉았다. 덩치 큰 개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지나간다. 퍼스에 도착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 노란 메시지 창을 확인하니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하는 연락이 몇 통 와있다. 잘 도착했다고, 괜찮다고 전해야 하는데 괜찮지가 않았다. 과연 여기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내 북받쳐 눈물 몇 방울을 떨궜다. 뭐가 그리도 무섭고 두려웠는지.
장장 15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퍼스 공항에 도착한 오후 5시 무렵, 분홍빛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붉은 노을이 그라데이션으로 번져가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온갖 걱정에 맘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시내로 가는 우버를 불렀다. 예약한 숙소를 가는 20분가량은 저물어가는 노을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사님의 무드 있는 선곡이 어우러져 꽤 낭만적인 시간이었는데 그 낭만도 잠시였다. 택시는 어둠 속 차갑게 흰 빛을 내뿜는 곳 앞에 멈춰 섰다.
긴장한 두 귀로 호주 액센트로 무장한 안내사항을 겨우 담아 들으며 숙소 카드키를 받아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트렁크와 내가 들어가니 조금 남을 정도로 아담했다. 내 방이 있는 층에서 문이 열렸고, 좁은 복도를 두고 내 키보다 그리 높지 않은 흰색 문들이 마주 본 채로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카드키를 찍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여니 낯선 이가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분이세요?” 그쪽에서 내뱉은 첫마디. 나는 그렇다며 어색한 첫인사를 건넸다. 겨우 트렁크를 펴고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에 두 개의 이층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 자리인 오른쪽 위 침대를 빼고는 며칠 생활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아침에 쓰고 걸어둔 타월, 지난날 쓰임을 받고 걸린 옷가지들, 없어서는 안 될 여러 충전기 선들. 인사한 그 이는 옆방에서 찾아온 누군가와 한바탕 떠들썩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차갑고 좁은 방엔 나 혼자 남았다. “후~” 이제야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숨을 내쉬었다.
대충 짐을 풀고 씻을 거리를 챙겨 공용 욕실로 나섰다. 긴 복도 끝에 위치한 욕실. 여전히 차가운 느낌이지만 꽤 깔끔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나절이 넘는 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가 넉넉히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유유히 씻겨나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시간. 머리를 대충 말려 옷을 걸치고 거리로 나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어둠에는 더욱 움츠러들고 만다. 아무리 밤이라도 도심 한복판인데 생각보다 한적함에 꽤 놀랐다. 열린 상점이 이렇게나 드물다니. 이 나라 워라밸이 좋다더니 이 정도인 건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은 국경일이었더랬다.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나마 불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곳으로 이끌려 가니 세븐일레븐과 맥도날드가 있었다. 익숙한 브랜드가 주는 친근함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결국 빨간 M이 선명한 로고 아래로 발걸음을 옮긴 나. 익숙한 버거의 이름을 찾다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버거를 주문했다. ‘그래, 아무리 맥도날드라도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걸 먹어보자’ 하고. 낯선 어둠이 두려운 쫄보는 포장한 걸 받아 들고 숙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며 그저 나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럴 리 없었다. 국적이 다른 이들이 갓 만나 들뜬 마음을 나누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을 슬금슬금 지나쳐 한적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불안한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져온 랩탑은 소용이 없었다. '역시 한국이 와이파이 천국이었어...' 하며 속으로 푸념 후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었다. 고기도 실하고 크기가 꽤 컸다. 고기가 실하군.
남은 것은 식욕뿐인 것 같던 시간이 지나가니 눈치 없는 불안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무치는 외로움, 쓸쓸함. 이럴 땐 자는 게 상책이다 생각하며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무슨 신이 그리 났는지 짙은 새벽에도 개의치 않고 떠들썩한 거리의 청춘들, 하루의 시작을 갈고닦으며 기계음을 윙윙대는 도시 청소부들. 열린 상점 없이도 잠들지 않던 도시의 소음에 자는 둥 마는 둥했던 첫날밤. 그러나 잠을 못 잔 건 중요치 않았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숨통이 조여올 거 같아 새벽같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깨지 않은 고요한 시간. 조용히 하려고 해도 예기치 못한 소음을 내는 데 선수인 나는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속도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렇게 탈출하듯 호스텔을 빠져나와 무작정 큰 공원 쪽으로 발을 재촉했다. 그곳에만 가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다독여질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공원의 이름은 '킹스파크'. 검색 중 '도심 최대 규모의 공원'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입구에서부터 압도적인 높이로 쭉 뻗은 채 환영하는 나무들을 보니 이곳이 맞다 싶었다. 한 없이 푸르르고 끝없이 광활했다. 올림픽 공원의 확장판 느낌. 여가를 즐기러 온 친구 혹은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와 같은 여행객 무리도 속속 보였다. 연신 셔터를 누르며 공원을 한참 구경하다 드넓은 크기에 이내 지친 나는 쉴 곳을 찾아 앉았다. 사실 팔다리보다 마음 쉴 곳이 필요하다 생각했지만, 푸르른 자연의 위로에 불안함이 조금 잦아든 걸 보면 아무래도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꼭두새벽부터 나무늘보가 되면서까지 호스텔을 나와 이 공원에 온 건 아무래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멍 때리던 시간. 걱정과 긴장에 축축해진 마음을 햇빛 아래에 슬며시 널어놓고는 비로소 제대로 된 쉼을 누리는 듯했다. 부디 축축한 마음이 내리쬐는 햇볕에 바짝 말라 보송하고 산뜻해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