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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25. 2021

Ep.5_미션: 호주 퍼스에서 집을 구하라(3)

워홀러의 호스텔 탈출기 완결 편


메시지는 낯선 호스트에게서 온 것이었다. 간략한 위치와 방에 대한 설명과 함께 먼저 입주(?)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호스트가 업로드한 공고는 없었다. 왜지? 의심의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프로필 사진이 정말 이 사람의 사진일까. 이름은 정말 Kelly인 여자일까. 집이 또 마침 내가 있는 곳 근처네? 이런 우연이? 정말 우연일까? 정말...? 아후. 이제 범죄 스릴러물을 그만 보든가 해야지. 세상이 흉흉하고 무서운 것도 맞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는 것도 맞다만, 이 콩알만 한 간으로 제 명에 못 사는 것은 아닌지!



이 Kelly인지 아닐지 모르는 Kelly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는데 데이지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트라이얼(trial) 날짜를 잡았다는 Daisy. 호주에서는 일하기 전 테스트하듯 트라이얼이라는 걸 한다. 쉽게 말하면 그냥 하루 일해보고 "지니 씨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듣는 거다. 혹은 내가 일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쪽이 제안을 해도 도망갈 수도 있는 것. 무튼 다음 기회가 생긴 것은 기쁜 일이었다. 2주 선배인 그녀가 잘 나아가니 그 발자국 뒤에서 걷는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6시가 가까워 오는 시각, 쇼핑몰이 닫을 시간인지 푸드코트에서는 떨이행사를 잔뜩 하고 있었다. 쇼핑몰이 6시에 닫는다고? 그 사실에 놀라 어버버 하는 와중에도 비빔밥 가게를 보자마자 발이 어느새 그 앞에 닿아 있었다. 때마침 저녁시간이라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자고 빠르게 합의를 본 둘이었다. 작년에 한국 여행을 하며 행복한 먹방을 했다던 데이지도 비빔밥이 좋다며 빠른 메뉴 합의를 이뤄냈다. 아, 이게 얼마만의 밥인가. 고추장이 감싸 어우러진 야채와 밥알들을 맞이한다니 혀 끝의 세포들이 신나 춤을 추는 듯했다. 식당 가서 한 끼 먹을 돈으로 비빔밥 두 개를 받아 들고는 뿌듯하게 푸드 코트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슥슥 싹싹 밥을 비비며, 데이지에게 아까 받은 메시지에 대해 말했다. 그랬더니 데이지가 또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한번 연락해봐~ 여기서 가까우니 같이 가보자. 둘이 가면 좀 낫지 않겠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피곤했을 터라 차마 물어볼 생각도 못했는데 다시 한번 고마운 제안을 하는 그녀. 그 덕에 마음이 든든해지니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범죄 스릴러의 전개가 잦아들었다. 드디어 Kelly라고 믿고 싶은 Kelly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마침 캐러셀 쇼핑몰에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오늘 집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낯선 곳에서의 전화가 익숙지 않아 그런지 귓바퀴부터 달팽이관까지의 모든 근육이 바짝 서는 듯했다. 전화 상의 Kelly는 프로필 사진처럼 여자가 맞았고, 목소리가 사근사근해 친근한 분위기를 듬뿍 풍기는 사람이었다. 곧 퇴근할 시간이라 쇼핑몰에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을 보니 보통 친절한 성격도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잠깐 당황해 또다시 시뮬레이션을 킬 뻔했지만 나에겐 든든한 데이지가 있지 않은가!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 아래서 드디어 켈리와 만났다. 쇼핑몰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있는 곳을 설명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 그녀가 쇼핑몰 지상 주차장으로 와 주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싱그러움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그녀, 나는 왜 대체 이런 그녀를 놓고 무시무시한 스릴러를 떠올렸던 걸까.


"네가 지니구나, 반가워~"

"반가워요, 켈리. 데리러 와줘서 고맙고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밝았던 하루도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정말 쇼핑몰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크한 얼굴의 냥이가 우아하게 걸으며 우리를 맞았다. "밀리, 잘 있었어~?" 



멋진 집이었다. 5성급 호텔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그녀의 모던하고 세련된 감각이 느껴졌다. 게다가 같이 사는 냥이, 밀리까지. 그것만으로도 점수가 두배는 더 올라갔다. 고양이는 키워본 적도 없고 다루는 방법도 몰라 그 앞에선 얼곤 하지만 강아지와 고양이는 언제나 옳다. 집에 두고 온 세 마리의 말티즈 친구들이 아른거리던 차에, 밀리에게 폭 빠져 집 보기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자고로 집은 해가 들어오는 때에 봐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우선 집이며 내가 쓸 방이 꽤 널찍하니 좋았다. 혼자 쓰는 화장실에 호스트와 나, 밀리까지 북적거릴 일 없는 구성원의 수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첫 만남부터 소소한 친절을 베풀어준 호스트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후였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밖을 느끼고 이만 가봐야겠다고 하니, 빌리지 앞까지 나와 기차역의 위치를 연신 설명해주는 그녀. 내 맘을 아주 단단히 흔들어 놓으신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듯, 배려와 친절은 내 맘을 춤추게 한다. 어쩐지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듯했지만 곧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서둘러 기차역을 향해 어둠을 뚫고 나갔다. 걱정이 들어올 틈 없이 꽉꽉 찬 하루였다.



그다음 날은 혼자서 예정되어 있던 두 개의 집을 더 보러 갔다. 깔끔한 한국인들과는 항상 잘 지내왔다며 호의를 표시했던 Nathan. 방의 크기가 조금 작았고, 너무 외곽에 위치한 것이 맘에 걸렸다. 역시 고양이 한 마리와 살며 여행사에서 일한다는 Cherina의 이층 집은 아기자기하고 예뻤지만 세가 조금 비쌌다. 다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켈리만큼 허물없이 다가오는 호스트도 없었다. 마음은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언제나 선택은 끝까지 어려운 법. 먼저 퍼스에 다녀갔던 친구에게 SOS를 쳤다.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친구는 생각보다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모든 게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같이 지낼 사람이라고. 심플하지만 힘 있는 조언에 끄덕거리며 맘이 정해진 쪽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받은 켈리는 기분 좋은 리액션으로 화답했다. 그 후로 우리는 신나게 이사 일정에 대한 문자를 주고받았다. 주말에 교외로 여행을 다녀온다는 그녀의 일정에 호스텔에서 이틀 정도 더 머물러야 했지만 중요치 않았다. 한 없던 기다림에 끝이 보이면 이제껏 없던 에너지가 대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게 퐁퐁 샘솟는다. 기쁜 마음으로 숙박을 연장하기 위해 호스텔 스텝에게로 갔다. 내가 있던 침대는 이미 예약된 손님이 있어 방을 바꿔야 하는데 괜찮냐는 스텝의 말에 정말 괜찮다며 한껏 여유로운 마음이 되었다. 대신 스페셜한 가격에 2인실을 주겠다는 말에 전에 없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이제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내일 아침이 되면 빠르게 옮기겠다는 마음으로 방에 돌아가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잠깐을 머물러도 사람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은 꽤 시간이 필요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누운 그날 밤,  봄 밤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이사 전까지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가 하는 기분 좋은 고민만 남아 있었다. '예쓰! 이제 오늘만 지나면 침대 삐걱거릴 걱정 없이 잘 수 있어!'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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